일반인도 볼만한 전문 그래픽 컨퍼런스, 시그래프를 아시나요?

일반입력 :2010/10/12 08:09    수정: 2010/10/12 08:16

남혜현 기자

폴 데베벡은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서 알아주는 유명인이다. 그런 그도 그래픽을 공부하던 공학도 시절이 있었다. 데베벡은 석사 시절, 자신이 개발한 그래픽 기술을 영화에 접목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만든 작품을 그는 컴퓨터 그래픽스 컨퍼런스인 '시그래프'에 출품했다.

시그래프는 단번에 데베벡의 진가를 알아봤다. 그의 작품이 출품작 중 최우수에 속하는 '일렉트로닉 씨어터'에 선정된 것. 당시 컨퍼런스에 참가했던 유명 영화 관계자는 그를 눈여겨 봤다. 바로 자신의 영화에 필요한 기술이라며 감탄을 터트렸다.

날아오는 총알을 360도 회전하면서 피하는 네오(키아누리브스 분). 매트릭스에서 가장 유명한 그 장면에서 시그래프에서 선정된 데베벡의 아이디어는 진가를 발휘했다. 데베벡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아바타, 수퍼맨 등 주요한 특수효과가 쓰인 영화 대부분에서 그의 천재적인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데베벡을 스타로 탄생시킨 '시그래프'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픽 컨퍼런스 중 하나다. 약 40년 역사를 자랑한다. 최근에는 서구 중심에서 아시아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시그래프 아시아는 2008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지난해 요코하마에 이어 올해 3번째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시그래프 아시아 주최측은 올해 행사의 핵심으로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꼽는다. 폴 드베벡을 유명인으로 탄생시킨 '일렉트로닉 씨어터'가 대표적 프로그램의 예다.1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는 시그래프 아시아 2010 개최를 두어달 앞두고 사전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인지도가 낮은 시그래프를 홍보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전면에 배치했다. 이날 공개된 티저 영상에서는 3D에서부터 특수효과 장면까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이미지를 공개했다. 페스티벌에 선정된 110여편의 작품들이 어느 수준일지 예상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 자리에서 추혜진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의장을 만났다. 그는 현재 온컴에서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그린 비전 하우스, 휴즈 드림 카운셀링 사이콜로지 센터에서 애니메이션 및 관련 분야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추혜진 의장은 그래픽 전문 컨퍼런스라고 해서 무조건 어려울 거라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운을 뗐다.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애니메이션이 이 행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술이 예술과 만나야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그에게 컴퓨터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추 의장과 나눈 일문일답.

- '시그래프'라는 이름이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다

그동안 시그래프가 '컨퍼런스'라는 이름 때문에 학구적인 이미지로 알려졌다. 그런데 행사를 잘 뜯어보면 전시나 페스티벌 등 흥미로운 내용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다. 공학이나 기술 개발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비주얼'이다. 일반인들도 컨퍼런스에 참여해서 신기술이 집약된 영상을 감상하고, 또 그 기술을 제공하는 업체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신기술 발표의 장과, 비주얼 영상, 그리고 그 회사의 기술 전시, 이 세가지가 어우러진게 시그래프 아시아다.

- 컴퓨터 그래픽스 부문에서 '애니메이션'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70년대 초반에 시그래프를 처음 개최하면서 픽사의 '윌리와 꿀벌'이라는 작품을 상영했다. 지금 보면 '모션 블로어'라는 기술은 너무 흔하다. 그러나 그때는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픽사라는 스튜디오가 단편 애니메이션 기술을 선보이면서 유명해졌고, 그 이후 계속해서 시그래프에서도 이런 작품들을 선정해서 공개했다.

시그래프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3D'나 '만화영화'만을 애니메이션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특수기술에서부터 광고, 뮤직비디오, 영화, 시각효과 등 다양한 분야를 애니메이션의 영역으로 끌어안는다는 데 장점이 있다.

- 최근 애니메이션에서 컴퓨터 그래픽 측면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기술이나 이슈는 무엇인가

몇 년전부터 게임 산업이 커지면서 이 분야에서도 애니메이션 영상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게임과 영상을 더하는 게 요즘 추세다. 게임 회사에서 말도 안되게 끝내주는 단편 애니를 내놓기도 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게임안에 기술과 예술을 녹여내면서 스토리텔링이 되는 게임 트레일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예가 '어쌔신 크리드'라는 게임을 만들어낸 헝가리의 디직 픽처스다. 동유럽은 역사적으로 애니메이션에 강한 국가들이 많았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최근들어 3D나 특수효과로 다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디직 픽처스가 유명해진 것도 단순히 기술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기술과 예술이 만나야 하나의 제대로 된 작업이 이뤄진다. 기술에만 치우쳐서 예술적인 부분을 간과하거나 본질적인 걸 지나치면 성공할 수 없다.

- 상당히 오랜 기간 프로그래머와 매니저로 애니메이션계에서 활동해왔다. 본인이 느끼는 이 분야의 매력은 무엇인가.

벌써 10년이 됐다.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면서 이같은 페스티벌에서 일할 수 있어 좋은 점은 전 세계에서 제작되는 작품을 1천여 편 이상 볼 수 있다는 거다. 보다 보면 눈높이도 높아진다. 또 작품을 제작한 사람들과 직접 만나 소통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제작자, 감독, 아티스트들을 만나 어떻게 만들었는지 직접 듣고, 네트워킹을 이어가는 것은 짜릿하다.

시그래프 아시아 2010을 방문하는 참관객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패널스 앤 토크'라는 세션이 마련되는데, 여기에 5개 작품의 제작자들이 관객과 직접 만난다. 아이언맨 메이킹, 스타워즈 TV시리즈, 루카스 필름의 게임 디자인, 토이스토리3의 기술부문 등을 이번 컨퍼런스에서 들을 수 있다. 또한 패널스디지털 아이디어를 통해 한국의 프로덕션도 소개된다. 국내 유명 작품의 CG를 도맡아 하는 회사다. 100여명의 기술자가 근무하는데, 이런 업체를 외국에 소개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이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디직픽처스의 '씨빌라이제이션 브이'를 추천한다. 게임의 시네마틱 비주얼이 강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패션 픽처스'도 좋다. 비틀즈의 인트로를 뮤직비디오로 만든 작품이다. 상당히 재미있게 2D와 3D를 혼합했다. 이 외에도 3D로 제작했지만, 기술적인 부분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뉴질랜드 작품 '포피(POPPY)'도 꼭 봐야 한다. 3D라면 스펙터클한 영상만 생각하는데 포피는 스토리도 있고, 감성도 살렸다. '로고 라마'는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작품인데, 사실 굉장히 위트가 있다. 난립하는 상표와 로고들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있는 작품이다.

- 시그래프 외에도 국내 유명 애니메이션 축제에도 관여해 온 것으로 안다. 일하다보면 해외와 비교했을 때 한국 애니메이션 축제에 아쉬운 점도 보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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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페스티벌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 좋은 점은 일하는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서 만난다고 해서 모두 소통이 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시그래프 아시아 같은 경우 각각 전문가들이 모두 다른 나라에 있기 때문에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소통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다. 매뉴얼이 잘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노하우 전승'이 어렵다는 거다. 시그래프 아시아 같은 경우 디렉터들이 기획부터 작품 선정까지 끝까지 책임을 지는 형태다. 의장이 페스티벌 디렉터처럼 책임 지고 예산부터 작품 선정, 퀄리티까지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해마다 운영진이 바뀐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행사라는 책임감이 적다. 시그래프는 의장이나 운영진이 바뀌더라도 '쉐도잉 프로그램'을 운영해 노하우를 책임지고 전승한다. 이전 축제 의장과 이번 축제 운영진, 다음 축제 책임자까지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해 같이 책임지고 간다는 점은 국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관계자들도 참고했으면 좋겠다. 유기적인 연결이 이뤄져야 한국에서도 '폴 데베벡'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