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제임스 본드 얘기같은 넌센스"

1962년 10월 5일 '007시리즈' 첫상영

일반입력 :2010/10/05 22:26    수정: 2012/10/29 17:06

이재구 기자

■불가리아 망명작가 런던한복판서 살해되다

1978년 9월 7일 저녁 영국 런던. 한 사나이가 워털루 광장에서 BBC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뭔가가 그의 오른쪽 대퇴부 뒷부분을 찔렀고 그는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등뒤에 서있던 한 사나이가 투박한 영어로 “미안합니다”라며 들고 있던 우산을 던져버렸다. 그러곤 급히 반대편에서 오는 택시를 잡아타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잠시 따끔했던 통증이 멎자 중년의 사나이는 그대로 그날의 방송을 마쳤다. 하지만 거의 10시간동안 아무렇지도 않던 그는 다음날 아내에게 열을 호소하다가 토하면서 병원으로 실려갔다. “나는 독침을 맞았어요 우산을 가지고 있던 사나이가 나를 찔렀어요.”

병원에서 괴로워하던 이 중년의 사나이는 4일 후 사망했다.

그는 불가리아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49살의 작가 게오르기 마르코프였다. 그는 망명후 BBC외에 ‘자유유럽’방송일을 함께 하고 있었다. 마르코프가 불가리아 당국에 ‘눈엣가시’였음은 누가 보더라도 자명했다.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던 마르코프 사망의 원인은 마이크로생물학전 전문가에 의해 밝혀졌다.그의 피부를 세심히 살펴 본 전문가는 백금이리듐으로 만들어진, 아주 미세한 핀의 머리보다도 작은 쇠구슬을 찾아냈다. 2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쇠구슬이 마르코프의 혈관 속으로 독을 흘려보낸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작은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첨단기술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기술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독극물도 리신(ricin)이라는 해독제를 찾지 못한 식물에서 추출한 독약이었다는 점이었다.

문제는 배후가 누구냐였다. 의혹의 눈초리는 당시 대서방 강경파였던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대통령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제임스 본드 이야기 같은 넌센스”라며 일축했다.

그것은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되는 007영화속의 허황된 미래같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007영화는 첨단기술의 또다른 코드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대통령이 불지핀 007소설의 인기

“우산을 사용한 킬러는 덴마크 인이었다.”

2005년 6월 5일자 영국의 더 타임스는 마르코프 암살사건 발생 27년 만에 세기의 암살사건의 배후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킬러는 불가리아 정부가 보낸 줄리노 바리라는 당시 32세 의 덴마크 남자였다. 불가리아 신문은 27년 만에 기밀해제된 불가리아 비밀경찰 DS의 기밀문서에서 암살자를 찾아냈고 더타임스가 이를 받아 보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킬러 얘기로 치자면 불가리아 대통령이 말했듯 ‘제임스 본드만한 것’이 없었다.

“당신의 소설을 영화화해 보고 싶소.”

1959년 앨버트 R. 브로콜리라는 영화제작자가 007시리즈를 쓴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2년 후 ‘카지노 로열(1957)’을 제외한 이언 플레밍의 모든 007소설에 대한 영화화 판권을 사들였다. 다행히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너무 영국적이고, 너무 섹슈얼하다”며 소설을 외면했다.

행운은 이 해 3월17일자로 발행된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부터 왔다. 케네디대통령이 자신의 10대 소설 가운데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을 9번째 애독서“라고 밝혔다.

세계정복을 꿈꾸는 악당조직에 가담한 전 GKB국장이 미모의 러시아첩보원을 서방세계에 위장 망명시켜 영국으로 러시아의 암호해독기 렉터를 빼돌리게 한 후 중간에서 이를 가로채 미-소 양국을 이간질시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책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브로콜리와 동업자 잘츠만은 이 해 7월 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츠와 EON프러덕션을 만들어 007 1탄 ‘살인면허(Dr.No)'를 만든다. 1962년 10월 5일 처음 상영된 자메이카 배경의 영화 ‘살인면허(Doctor. No.)’는 007영화시리즈 대박신화의 신호탄이었다.

■스파이의 피가 흐르는 이언 플레밍의 가문 내력

'16세기 스파이였던 ’존 본드‘라는 귀족가문이 이언 플레밍의 소설 ’007‘에 영감을 주었다.’

2008년 10월 30일자 영국 텔레그래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시절에 비밀 요원으로 활약했던 스파이 존 본드의 개인 일기가 발견됐다며 이같은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는 이어 본드 가문은 퍼벡섬의 도셋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도셋은 007의 작가 이언 플레밍이 유년기를 보낸 곳이었다.

이어서 일기에 등장하는 존 본드 가문의 모토는 Non Sufficit Orbis, 즉, “세계는 충분하지 않다(The World Is Not Enough)“라고 전했다.

희한하게도 이 일기속 모토는 이언 플레밍의 소설 ‘여왕폐하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cret)’(1963)에 등장했고 그의 사망(1964)후에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내용 그대로다.

백설로 덮여있는 스위스 알프스 정상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1970년대 TV브라운관에서 형사 코작 역으로 인기스타였던 대머리 배우 테리 사발라스가 나온다.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작위심사관으로 위장한 007은 임시로 유서깊은 귀족가문으로서 행세하게 된다. 그가 귀족으로 변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가문의 모토는 “세계는 충분하지 않다”였다.

이처럼 이언 플레밍이 실제로 007이라는 평균 5억달러에 달하는 흥행 보증수표인 영화의 배경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집안내력에다가 그 핏줄을 그대로 반영한 그의 영국군 특수요원 경험도 한몫했다.

1939년 해군정보부 장교로 차출된 그는 하루종일 문서를 분석하고 처리하는 임무를 담당했었다. 영화속 제임스 본드가 항상 말하듯 이언 플레밍의 최종 계급은 실제로도 중령(Commander)이었다.

■마치 하이테크 경연장 같은 007영화

“수백년간 연금술사들은 금을 만들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이제 실리콘으로 황금보다 값진 마이크로칩을 만들고 있죠....이에 카르텔을 만들어 단순한 제조를 넘어 유통까지 하는 겁니다.”-‘뷰투어킬(A View to a KIill)(1985)’ 전 KGB요원 출신 악당 조린은 전세계 반도체제조협력업체(미국을 제외한)들을 모아놓고 음모를 꾸민다. 그가 자신의 비행선에 마련된 회의장 테이블 위에 칩을 던지자 테이블바닥은 갈라지고 그곳에 실리콘밸리의 축소모형이 나타난다. 조린의 음모는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샌앤드레아스 지질대 좌우의 지하에 폭발을 일으켜 인공지진으로 실리콘밸리를 수장시키는 것이었다

악당 조린의 말대로 실리콘 밸리는 “250여 칩 공장과 수많은 전문가 미국 전자산업의 심장,전세계 마이크로칩의 80%...”을 담당하는 첨단기술의 심장이었고 오늘날도 IT의 심장이다.

007에서는 단순히 악당이 하이테크를 장악한다는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머리좋은 악당들이 첨단기술을 가지고 누구보다도 먼저 우주를 개척한 모습까지 내비쳐 보이면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간다.

1979년. 미국이 쏘아올린 허술한 우주정거장 스카이랩이 추락하던 그해 007시리즈 영화 '문레이커(Moon Raker)'의 감독은 '지름이 200m나 되는 우주시티'를 창조한다. 악당 드레이크의 계획은 선남선녀를 우주도시로 옮기고 지구인을 멸종시킨 후 자신의 새 지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아의 방주계획이었다.

악당 드레이크가 우주선 탈취과정에 등장한 우주왕복선은 영화가 나온 지 3년 후인 1982년에야 미국이 최초로 쏘아 올려졌다. 문레이커는 SF보다도 훨씬 더 현실에 가까운 영화였다.

현실에서 우주정거장(ISS)은 1998년 건설되기 시작했고 오는 2020년까지 사용될 전망이다.

■테러와 환경으로 눈돌린 스파이

“전자회로의 파동으로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지요.”

“그럼 골든아이는 존재하는군.”

IT와 전자기술로 대표되는 첨단기술을 직접 보여준 악당 이야기의 정점은 골든아이(Golden Eye)(1995)일 것이다.

EMP(Electronic Magnetic Pulse)의 영향을 받지 않는 헬리콥터가 탈취되어 날아 가는데도 이를 지켜봐야 했던 제임스 본드와 국장 ‘M’의 대화는 조만간 EMP의 공식적인 등장을 예고한다.

영국에 원한을 갖고 있는 테러조직 야누스의 두목은 해커를 동원해 런던은행을 털고 돈을 이체한 후 EMP위성에서 전자파를 쏘아 은행전산망을 마비시킨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1989년 소련제국이 붕괴되면서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스파이의 역할은 차츰 바뀌기 시작한다.

에니그마를 본뜬 10kg무게의 암호분석기 렉터(Rector)와 미인계를 위한 아리따운 미녀 스파이가 함께 나오는 ‘위기일발(1963)’같은 냉전시대 속 로맨스영화는 더 이상 나오기 힘들게 어렵게 됐다.

가까운 미래를 예고할지도 모를 인상깊은 첨단기술이 동원된 장면으로는 ‘카지노 로열(2006)’에서 위치추적용으로 본부에서 제임스 본드의 팔뚝에 심어놓은 생체인식칩이 있다.

‘퀀텀오브솔라스(2008)’에 이르면 본드의 역할은 전자적으로 위치를 알려주는 지폐가 등장한다. 어느 새 첩보영화의 배경 소재는 볼리비아 반군과 사막, 그리고 고갈되는 물, 즉 환경문제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난 미국이 공산주의에 신경안쓰면 어찌되나 했지.”

“일주일에 한번 씩 정부가 바뀌는데 그 어느 쪽도 아니지. 속고 있는 것 같아.”

두 첩보원의 대화는 냉전시대와 달리 적과 아군의 구별이 모호해진 신세계 질서 속에서 방황하는 스파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 ‘크레이그는 본드가 아니다(danielcraigisnotbond.com),

“이 웜은 이란내 컴퓨터 3만대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이란에 대한 사이버 전쟁의 일부다.”

지난 9월 26일 뉴욕타임스는 이란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어 2010년 초부터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해 이란 원전을 움직이는 엔지니어들의 PC를 감염시킨 웜 소식을 전했다.전세계 뉴스보도도 이란이 핵무기용 연료를 만드는 시설로 의심받고 있는 원전과 주요 시설물 제어 컴퓨터 주변에 퍼진 웜에 대해 궁금해 할 뿐인 가운데 의혹은 증폭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웜은 인도는 물론 미국의 시설물까지 감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예전 같았으면 이란 원전에 침입한 스턱스넷 웜같은 소재를 쓰고도 남았을 법한 007시리즈 영화제작자들이 웬지 그런 멋있는(?)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습은 지금까지 '스마트한' 인상을 풍겨온 제임스 본드보다는 오히려 '브루스 윌리스'라는 한물 간 아날로그 형사가 등장하는 영화 '다이하드4.0(2007)'에 더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전직 정부요원이 디지털테러리스트으로 변신해 정부의 전산망에 침입, 미국의 교통,통신,금융,전기의 모든 네트워크를 장악해 미국을 마비시키려 한다는 설정이었다.

게다가 첨단이라면 서러워할 제임스 본드영화 제작자들은 인공지능(AI)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는 설정의 액션스릴러 '이글아이(2008)'같은 영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최초의 영화가 나온 지 50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도 브로콜리 가문은 대니얼 크레이그를 007로 내세운 22번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제작자(바바라 브로콜리)로 나서고 있다.

본드영화는 심지어 ‘크레이그는본드가아니다(danielcraigisnotbond.com)'라는 웹사이트까지 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전세계 007팬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안타깝게도 2010년 4월 MGM영화사의 재정난에 이어 007시리즈 23편인 ‘본드23(Bond23)'의 제작이 무기한 연기됐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지난 48년 간 주연 배우를 6명이나 갈아치우면서 단 차례도 거침없었던 제임스 본드 중령의 드라마가 마침내 미궁속으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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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MGM은 007 등장 50주년을 맞이해 대니얼 크레이그 주연의 스카이폴을 내놓으며 제임스 본드를 화려하게 부활 시켰다. M이 장관앞에서 영국정보부 MI6의 존재 이유를 시로 설명하는 부분과 스카이폴 저택에서 맞이하는 M의 운명은 매우 인상적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