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 빌 게이츠가 두려워 한 차고창업자

2004년 8월19일=구글, 세상을 바꿀 검색기술로 나스닥 진입

일반입력 :2010/08/12 19:56    수정: 2010/08/16 19:51

이재구 기자

불현듯 생각난 혁명적 아이디어.

웹 전체를 다운로드 한 다음, 링크만 남겨 놓을 수 있다면....”

1995년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신없이 종이에 쓰기 시작한 사람은 스탠포드대 2학년 학생 래리 페이지였다.

야후가 탄생하고 이 회사의 라이벌 AOL이 거의 5백만 인터넷가입자를 유치한 해였다. 1년전 넷스케이프가 탄생했고 인터넷산업은 바야흐로 개척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래리는 마악 “웹이라는 바다 전체를 분류하는 검색엔진을 만들겠다”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터였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멘토 위노그래드교수에게로 달려가 이에 대해 설명했다.

“웹을 전부 다운로드하는데 한 1~2주일이면 될 걸세”

그의 말을 들은 위노그래드 교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실 훨씬 더 걸릴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자의 의욕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의 친구 세르게이는 이 얘기를 듣고 “어떻게 하면 원래의 페이지 링크뿐 아니라 링크에 연결된 링크까지 계산할까”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작 웹링크 구조를 모조리 다운로드하려 한 래리 페이지는 아직 자신이 그걸로 무엇을 하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래리와 세르게이가 만든 것은 웹검색에 관한 한 초기수준의 인공지능과도 같은 혁명적 검색 엔진이었다. 거기엔 인터넷으로 이뤄진 경제사를 새로 쓰게 할 비즈니스혁명의 불씨가 숨어있었다.

탁월한 검색기능과 웹검색 방문자 대상의 광고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줄 이 엔진은 전성기 IBM과 MS를 넘어설 혁명적 기업 탄생 아이디어의 시작이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박사과정을 마쳐도 좋네!

두사람은 '백럽(BackRub)'이란 이름으로 비밀리에 검색엔진을 개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사람은 기업가가 되고 싶은지 학자가 되고 싶은지 자신들도 알 수 없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언제든 돌아와서 박사과정을 마쳐도 좋네.”

제프리 울먼교수가 학위에 연연하지 말고 대학을 떠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논문은 이미 제출된 상태였다. 1998년 1월 제출된 이들의 논문내용은 웹 페이지 2천400만개로 구성된 DB내용에 기반한 것인데 일반 검색에 1~10초가 걸렸다. 두 사람은 당초 ‘구골(googol)’, 즉 10의 100제곱을 의미하는 엔진이름을 쓰기로 했지만 도메인을 선점당하자 ‘구글(google)’로 이름을 바꾸었다.

“첫째, 웹의 링크 구조를 활용해 각 웹페이지의 품질 순위를 결정한다...둘째, 구글은 링크를 활용해 웹페이지의 ‘페이지 랭크’를 빠르게 계산하게 해주는 맵을 만든다.”

논문은 정확한 구글엔진의 중요한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 이들의 검색엔진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5월이 돼도 투자자나 인수자가 안나타났다. 당시 야후,인포시크,익사이트 같은 포털들은 좋은 자리에 광고를 배정해 비싼 광고비를 받고 있었다. 이 모델은 고객이 와서 오래 머물러야 좋은 것이었다. 빠른 검색은 필요없었다.

스탠포드대학 측은 구글의 컴퓨터가 너무 많은용량을 잡아먹는다며 독촉해 대고있었다. 돈이필요했다. 창업시점이 온 것이다.

1998년 9월 두사람은 울만 교수가 소개한 실리콘밸리의 엔젤투자자 슈리람으로부터 25만 달러를 받았다. 전 달에 이미 썬의 창업자 앤디 벡톨샤임이 10만달러를 투자했다. 비노드 코슬라는 75만달러에 사인했다. “실리콘밸리에 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라던 제프 베조스 아마존 창업자도 가세했다.

■“누군가 차고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있을까 두렵다.”

“가장 두려운 장애물이 무엇인가요?” 1998년 워싱턴주 레드먼드시. 50대 중반의 뉴요커지 칼럼니스트가 MS 캠퍼스에서 세계 IT업계 정상인 빌 게이츠회장을 만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차고에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개발하고 있지 않을까 두렵군요.”

컴퓨터 황제에게서 뜻밖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우연히도 그 해 7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란 두 스탠퍼드대 학생이 회사를 만든다.

래리 페이지가 CEO, 세르게이 브린이 사장이었다. 래리는 수표를 기숙사 방에 몇주 동안 보관해 둔 채 회사를 차리고 은행계좌를 만들어 놓은 참이었다. 두사람은 첫 번째 직원으로 동료 학생 크레이그 실버스타인을 채용하고 나서 사무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브린의 여자친구 수잔 보이치키로부터 월세 1천700달러에 방을 빌려쓰기로 했다.

임신 중인 수잔은 프라이버시 보호차원에서 세입자인 그들에게 차고문을 이용해 사무실로 들어가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구글이란 회사의 주소로 차고주소를 쓰고 실리콘밸리의 가장 고전적 창업형태인 차고창업에 들어가게 된다. 빌 게이츠의 막연한 두려움은 무서우리 만큼 정확한 것이었다.

1999년초 인터넷 거품이 끓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브린과 페이지는 가장 유명한 벤처캐피털인 세콰이어와 클라이너퍼킨스(KP&CB)에 투자를 요청했다. 세콰이어는 야후에, KP&CB는 AOL과 익사이트에 각각 투자하고 있었다. 이들이 구글의 총 1억달러 투자계획 가운데 2천500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구글은 주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놀라운 질주는 아직 시작도 된 것이 아니었다.

IT공룡의 엔진이 다듬어지다

2001년 1월. 애플의 아이튠스와 위키피디아가 등장해 인터넷 생태계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그 해 후반 구글의 애드워즈 광고모델은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초기의 애드워즈는 광고주들에게 낡은 방식, 즉 검색자가 광고를 클릭하든 않든 간에 1000건당 비용으로 쳐서 받는 방식(CPM)으로 서비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트를 쳤고 수익도 괜찮았다. 래리와 세르게이는 여전히 구글이 큰일을 해 낼 것이라며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취임한 지 1년이 안된 에릭 슈미트 구글CEO는 불안했다. 누가 뭐라든 간에 확실한 성장엔진이 보여야 하는 데 그의 눈엔 그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발진들은 오버추어의 전신인 고투닷컴의 광고모델에 주목했다. 1977년 빌 그로스가 만든 이 사이트의 수익모델은 돈을 많이 내는 광고주의 광고가 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래리와 세르게이가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이 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빌 그로스는 이 모델에 대해 “전화번호부에 돈을 더 많이 내고 더큰 광고를 게재해 더 많은전화를 받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2002년 2월 구글은 새로운 애드워즈를 개발해 발표했다.

이 검색 키워드 광고는 구글이 키워드 별로 최저가를 설정해 낙찰 시키는 것이고 차순위자는 1센트만 더 얹어서 내더라도 낙찰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여기에 클릭당 비용청구 방식을 결합했다.

1년후 구글의 두 번째 '돈버는 기계' 애드센스가 등장했다.

이 방식은 이메일에서 쓴 단어와 광고주가 선택한 키워드를 연동해 작은 텍스트 광고가 즉시 나타나도록 SW를 손본 것이다. 2004년 애드센스는 구글수입의 약 절반을 차지했다.

■MS-야후, 위협을 감지하다.

MSN과 야후는 잉크토미나 구글에 아웃소싱을 통해 알고리듬 검색이나 편집 검색으로 알려진 고성능 검색결과를 얻고 있었다. 웹을 통해 검색하는 사람들의 절반이상 아니 거의 모두가 이제는 유료검색광고를 클릭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물품을 찾고 구입하기 위해 웹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매우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구글은 이제 야후 MS 등과 경쟁하기 위해 비상장 기업에만 머무러 있을 수 만은 없었다.

2000년이 다가오면서 구글은 실리콘 밸리뿐만 아니라 뉴욕 월가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 실적을 공개하지 않은 구글의 2003년 매출은 10억달러 가까이 되고 순익은 3억달러 이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그 수준이었다.

2004년 봄 기업공개를 한다고 발표했을 때 구글도 여타기업들처럼 증권거래소(SEC)에 재무상황을 공개해야 했다.

“젠장, 이제껏 이런 좋은 기삿거리를 놓치고 있었다니!”

기자들은 구글 홍보실에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지만 상장시점이라 구글사람들도 SEC규정에 따라 함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야후와 MS도 구글이 그들의 사업에 위협을 가할 거대한 힘이 수면위로 부상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싼 주식과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당장 구글을 저지할 또렷한 방안은 없었다.

2004년 4월 29일 구글은 분명히 근래보기 드문 가장특별한 공식 기업공개서류를 증권거래소에 제출했다.

구글은 27억 1828만 1828달러어치의 주식을 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수치는 원주율 파이와 같은 개념으로 수학에서 자연대수로 불리는 ‘e’와 같은 숫자였다.

■구글, IT업계 슈퍼파워로 비상할 준비를 마치다

2004년 8월 19일 래리 페이지는 평소의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 대신 정장을 입었다. 구글의 나스닥 기업공개일이었다. 슈미트와 함께 나스닥 개장시간에 맞춰 밤새 뉴욕을 향해 날아갔다. 투자자들, 그리고 구글 간부 등 10여명이 동행했다.

래리 페이지는 최초의 신청서를 제출한 지 거의 넉달 만에 나스닥에서 상장기념 종을 울렸다. 상장 시작가는 주당 85달러였다.

“100달러에 매수제안이 나왔습니다.”

일찍이 1995년 인터넷 보고서를 내면서 구글같은 인터넷 공룡시대가 올것을 예고했던 모건스탠리의 중개인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차분하게 말했다.

페이지와 슈미트, 그리고 임원들은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구글 뉴욕사무소로 향했다.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래리 페이지가 차문이 닫히자 마자 휴대폰을 꺼내면서 외쳤다. 단숨에 억만 장자가 된 것이었다.

다음날 구글주가는 109.31달러까지 상승하며 당초 공모가 예상범위를 돌파했다. 그리고도 계속 상승해 11월에는 200달러를 넘어섰다.

“검색에 있어서는 구글이 우리를 한방 먹였다“

구글의 등장 이전까지 IT업계를 주무르던 MS의 빌 게이츠도 마지 못해 거인 구글의 존재를 인정했다.

관련기사

하지만 구글의 기업공개자료에 들어있는 전략적 선언은 IT업체들이 듣기에는 두려운 선전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기술회사로 시작해서 SW,기술,인터넷, 광고,미디어회사가 모두 하나로 통합된 기업으로 발전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