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나의 애플은 어디있지?”

1981년 8월12일=IBM5150 세상에 나오다

일반입력 :2010/08/05 20:08    수정: 2010/08/14 13:33

이재구 기자

■ PC의 혁명, IBM 5150의 시작

1980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서방세계가 보이콧한 모스크바올림픽이 한창 열리던 7월 넷째주.

프랭크 케리 IBM 회장은 뉴욕주 아몽크 소재 본사에서 경영위원회(MC)를 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임원들과 ‘왜 IBM이 개인용컴퓨터를 만들 수 없는지’에 대해 다시 회의를 하면서 질문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는 최근 수년간 PC업체들의 급부상에 대해 “나의 애플은 어디있지?”라며 주변을 채근해 대고 있었다. IBM은 중대형 컴퓨터로 돈을 벌고 있는 컴퓨터제국의 황제였다. 하지만 시장은 온통 PC얘기로 넘쳐 흘렀다. 이미 중소PC업체 100곳이 PC시장에 참여해 60억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애플II가 단연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도 그동안 IBM이 만들어 냈다고 하는 것은 고작 1975년 나온 5100시리즈와 데이터마스터등 두가지 형편없는 제품 뿐이었다.

MC에 참석한 빌 로위는 지난 수년 간 IBM주변에 포진한 작은 회사들이 ‘그들만의 새로운 기계’로 공룡 IBM을 수 년 동안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분위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제게 허용된다면 1년 안에 애플제품보다 훨씬 강력한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는 IBM이 최근 수년간 잇따른 사업실패로 빈축을 사고 있던 PC사업에 대해 보고하면서 이같이 제안했다.

“이것은 정말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기계야! 우리는 이 기계를 만들어야 해.”

그의 보고를 듣고 있던 온화한 성품의 프랭크 케리 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자금담당 잭 로저스가 일반제품부에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퍼스널컴퓨터에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다고 하자 케리 회장이 되받았다.

“신경쓰지 말게. 자금은 내가 만들지.”

연간 250억달러 규모의 중대형컴퓨터 사업을 해오던 IBM이 PC시장의 일부를 접수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IBM은 공룡기업답게 양산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돈 에스트리지와 '사나운 12인(Dirty Dozen)'

7월말 빌 로위가 MC회의장에서 나왔을 때 12명 정도의 PC사업 관계자가 추진비용을 승인받았는지 알고 싶어했다. 빌 로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긋 웃었다.

하지만 초가을 미네소타 로체스터 총본부장 마틴이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자 로위가 후임자로 선택됐다. 그는 10월 IBM의 역사상 가장 카리스마적인 인물중 한명으로 불리는 돈 에스트리지를 PC사업 후임자로 지목하고 떠났다.

케리 회장은 돈 에스트리지에게 자신에게 직접 보고를 받았다. 물론 IBM경영진은 도마뱀가죽으로 만든 카우보이 장화를 신고 다니는 이 개성강한 골칫덩이에게 이 일을 맡길 필요가 있을까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IBM비밀 프로젝트 연구소가 위치한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보카 레이튼(Boca Raton:스페인어로 ‘생쥐의 입’이란 뜻)은 한적한 마을이었다.

후일 사나운 12인(Dirty Dozen)으로 불리운 개발자들은 IT역사상 불멸의 IBM신화로부터 꺼지지 않는 PC산업의 신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들은 ‘체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아래 의 퍼스널컴퓨터(Personal Computer)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코드명은 ‘에이콘(Acorn), 즉 도토리였다.

1981년 빌 로위가 직접 후계자로 임명한 돈 에스트리지는 로위의 방식을 답습해 에이콘을완성했다. 그는 컴퓨터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대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지적함하는 등 간섭을 줄이고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했다.

‘사나운 12인’의 한사람이었던 댄 윌키는 ”지난 14년동안 IBM에서 했던 것보다 PC사업에 참여했던 초기 30일간 더 많은 결정을 했다“고 회고했다.

■IBM, 게리 킬달과 빌 게이츠를 만나다

1980년 7월의 네 번째 주말이 지난 후 IBM의 임원 잭 샘즈는 워싱턴 벨뷰시에 있는 한 청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50대의 머리가 벗겨진 빌 로위는 그에게 IBM의 PC프로그램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문의하고 있었다.

하버드대를 중퇴한 이 청년은 당시 사용되던 대부분의 PC를 프로그래밍한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아들뻘인 24세 청년의 이름은 빌 게이츠였다.

“물론입니다.난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2주일 후가 어떨까요? 그러나 굼뜬 관료조직 IBM의 임원은 “내일은 어떻소?”라고 말해 청년을 놀라게 했다.

이 24세의 젊은 프로그래머는 ‘여간내기가 아닌’ 사업가였다. 게이츠는 MITS사의 PC에 프로그래을 공급했던 경험을 통해 카피당 라이선스 비용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황금알을 가져다 주는지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는 IBM이 원하는 OS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유력SW업체의 제품을 원했던 로위는 당시 PC시장의 OS를 주도하던 DRI사의 CP/M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IBM은 이 회사의 게리 킬달CEO에게 CP/M을 개당 10달러씩 쳐서 수십만달러의 정액으로 러이선스를 제공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게리 킬달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980년 늦가을 빌의 친구 앨런은 우연히 DRI사의 복제품(clone)을 공급하던 시애틀컴퓨터를 발견, 이 회사에 IBM의 'I'자도 꺼내지 않은 채 불과 7만5천달러에 패터슨의 운영체제(OS)인 Q-DOS를 구입했다.

MS는 이 OS의 이름을 MS-DOS로 이름 붙여 IBM에 공급하게 된다. OS판권을 넘겨받은 MS는 승승장국 30년후 MS는 OS로만 연간 순익만 100억달러를 도출한다.

후일 래리 엘리슨 오라클 회장은 MS에 OS판권을 넘겨준 IBM의 처사에 대해 '1000억달러 짜리 실수'라고 언급했다.

IBM, 인텔CPU를 선택하다 “게리 킬달의 OS와 같은 8비트용 베이직(BASIC)언어로 프로그래밍 해 줄 수 있겠소?

DRI사와의 OS공급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MS를 만난 IBM은 두 번째 만남에서 MS에 이같이 요청했다.

“16비트프로세서를 사용하면 그 어떤 경쟁제품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할 것이며 기억용량도 확대시킬 수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선선히 16비트 프로세서를 추천했다.

IBM이 16비트는 커녕 8비트 OS를 지원할 프로세서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빌게이츠가 IBM을 또한번 설득하기 위해 나섰다.

16비트 프로세서를 채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인텔,모토로라,내셔널세미컨덕터 등이 모두 16비트 프로세서를 생산하고 있었다.

인텔의 8086프로세서는 성능아 강력했으나 기억장치 구조가 일반 프로세서들과 달랐다. 8088은 용량이 부족했다. 모토로라 68000프로세서는 위력적이면서도 SW작성 능력이 우수했고 내셔널 세미컨덕터는16032는 성능이 우수하면서도 강력했다.

IBM에겐 별도의 지원칩 개발없이 당장 사용가능한 8088이야말로 PC개발조건에 완전히 들어맞는 제품이었다. 게다가 주력인 미니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난 칩은 부담스러웠다.

IBM이 인텔칩에 관심을 보였을 때 인텔은 만족해 했지만 정작 자신들이 IBM과 맺은 계약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텔은 후일을 내다보고 전략적으로 가격을 낮춰 불렀다. 칩가격은 개당 9달러였다.

메모리에서 일본의 추격으로 위기에 빠졌던 인텔은 이를 기폭제로 CPU에 매진, 20여년동안 단 한차례도 반도체 1위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 “정말 100만대를 팔 수 있겠는가?” 1981년이 지나면서 HW와 SW가 신속한 진척을 보였다. HW 부문은 3월에 끝났고 OS는 6월에 완료됐다.

“정말 3년 동안 1·00만대를 팔 수 있겠는가? 20만대로 낮추게.”

아몽크는 돈 에스트리지의 PC 판매예상 보고서를 믿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IBM은 1년에 고작 2천500대의 메인프레임을 파는 데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IBM5150은 IBM이 기업의 전문가나 정부 관공서가 아닌 일반소비자에게 처음으로 출시한 컴퓨터였다. 돈에스트리지는 IBM의 대리점으로 컴퓨터랜드와 시어스를 선정했다.

1981년 8월11일 발표를 하루 앞둔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모든 준비를 마친 돈 에스트리지는 동료들과 만찬을 가졌다. 이들은 회사 고위층의 의구심과 달리 수백만대의 PC를 팔 수 있다는 자신감에 들떠 있었다.

돈 에스트리지는 “과연 사람들이 올까?”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다음날 아침 거의 모든 중요한 언론매체가 몰려왔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가장 싼 컴퓨터시스템을 소개합니다. 이 제품은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1981년 8월 12일, IBM은 무게 11kg의 신제품을 선보였다. 기존의 모델과 달리 달리 CRT모니터 등이 붙어있고 속도,신뢰성이 높아진 근사한 PC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예상대로 짤막하게 IBM이 PC시장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IBM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PC도 이제 어엿한 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스티브 잡스는 월스트리트저널에 “환영, IBM. 진심으로 ”라는 장난기 어린 광고를 내고 IBM을 조롱했다.

성공을 대변한 ‘한발의 총성’

IBM임원들이 그들의 PC가 어떤 반향을 몰고 올지 깨닫는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러나 IBM 5150이 나온 그 해 가을 뉴욕 화이트플레인즈의 컴퓨터랜드점 사장은 IBM PC의 대성공을 직감했다. 그것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울려퍼진 한발의 총성 때문이었다.

그는 권총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사람으로부터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살하려고 하루종일 걸어다녔는데 마침 이 가게 앞에서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을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

돈 에스트리지는 IBM본사의 에상을 뛰어넘고 1년이 조금지나서 20만대를 팔았고 원래 계획대로 100만대를 팔아치웠다. 곧 그는 한달에 20만대이상식 PC를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2년도 안돼 IBM사는 PC시장의 주도자가 되었다.

대당 1천575달러짜리 이 컴퓨터는 당시 미국인의 월평균 소득이 700달러였음을 감안할 때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현재 PC가격을 100만원으로 볼 때 현재의 가격으로 550만원 정도에 달하는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당신 사업이 이렇게 성공을 계속하면 IBM의 본부를 아몽크에서 보카 레이튼을 옮겨야 하겠는 걸”

1982년 타임지가 PC를 '올해의 기계(Machine of the Year)'로 선정했을 때 새로 사장으로 부임한 존 에이커즈는 에스트리지에게 농담을 던졌다.

1945년 왓슨 IBM회장이 “전세계적으로 시장 수요가 5대 정도일 것”이라고 냉소적으로 쏘아붙였던 PC산업에 대해 IBM이 마침내 PC시장은 마침내 개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일 이른바 윈텔(Windows-Intel)로 불리는 MS와 인텔이 주도하는 PC전성기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IBM은 MS에 OS판권을 넘겨주고 인텔 투자지분을 거둬들이는 등의 연이은 실수를 하면서 PC시장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관련기사

“컴퓨터는 이제 가정용 장난감이 됐어.

IBM 5150 등장 25주년의 자리에서 당시 '더티 더즌'의 한사람이었던 데이비드 브래들리는 현대인에게 다가오는 컴퓨터의 의미를 '장난감'이란 키워드로 요약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