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노벨상 신화’ 물꼬를 트다

1898년 5월27일=전재산 기증 반대 소송하던 가족들 유언에 합의

일반입력 :2010/05/26 12:13    수정: 2010/05/26 22:57

이재구 기자

■‘죽음의 상인’이란 비난과 충격

“내가 죽었다니!, 그리고 죽음의 상인이라니...”1888년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파리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에는 ‘죽음의 상인, 사망’이라는 제목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사람죽이는 방법을 개발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기사가 쓰여있었다. 부고의 실제 주인공은 형 루드비히 노벨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동시에 노벨의 사후 평가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전쟁용 폭탄인 다이나마이트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의 이미지임을 새삼 깨달았다.

사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전쟁용보다 훨씬 많았던 광산 및 건설용 다이나마이트 판매량 때문이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흔들려도 터지지 않는 안전한 폭발물 다이너마이트 특허를 받은 1867년. 때마쳐 이어진 수에즈운하 및 알프스산맥 터널공사 등으로 사업은 번창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워도 할 말이 없었다. 다이너마이트가 전장에서 대규모 인명 살상용 무기로 사용된 것도 사실이었다. 1870년 보불전쟁 때는 프랑스정부가 6만프랑을 지원하며 다이너마이트 공장 설립을 요청했다. 그는 끊이지 않는 다이너마이트의 수요에 맞춰 21개국에 95개의 공장을 설립했다.

잘 나가던 그에게 갑작스레 등장한 자신을 대상으로 한 이 기사는 노벨에게 쇼크였다.

노벨이 60세에 만난 비서 베르타 폰 주트너란 아가씨는 “전쟁종식을 위해 무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노벨의 생각은 달랐다. “가공할 무기를 만들면 전쟁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결국 노벨은 생각을 바꾸기에 이른다.

■7차례나 고쳐 쓴 유언장

“이 유언장을 맡아 두게나.” 1895년 11월 27일. 62세의 노벨은 유언장에 최종 사인을 하고는 이를 한 젊은 엔지니어에게 건넸다.

벌써 일곱 번째 고친 것이었다. 그는 협심증을 앓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수정이 될 것이었다.

4장으로 된 유언장 가운데 한 장도 안되는 내용에는 현대 세계를 위해 놀라운 문학,과학,평화 등 5개부문에서 이룬 탁월한 업적을 성취한 사람에 대한 시상과 그의 전재산을 기금으로 만들어 거기서 나오는 이자의 대부분으로 시상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라그나 솔만은 노벨이 지정한 두사람의 유언집행자 중 한사람이었다. 14장으로 된 이 유언은 최초의 노벨상을 이끄는 주요한 행사와 환경에 대해 쓰고 있었다.

국제적 사업가였던 노벨은 이태리 산레모 연구실에서 같이 일하던 젊은 화공학자 라그나 솔먼과 루돌프 릴리예퀴스트를 그의 유언장 집행인으로 지정했다.

그의 재산이 유럽 각국에 퍼져 있었으므로 2명의 유산 집행자들은 시급히 그의 재산을 스웨덴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정부가 노벨의 돈을 고국으로 옮기는 것을 막으리라는 의심 때문에 2명의 젊은 엔지니어는 서둘러 노벨의 주식과 채권, 그리고 다른 토지관련 문서들을 그러 모았다. 포장용 상자에 담긴 문서는 파리의 철도를 이용해 등기화물로 스톡홀름으로 부쳐졌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라그나 솔먼은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을 집행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섰다. 5년 후인 1900년 6월29일 노벨재단이 출범하자 그는 노벨사무국이 자리잡힐 때까지 재단 집행이사를 맡게 된다.

■전재산 기부에 대한 거센 반발

“이 재산은 기금을 만들어...그 이자를 떼어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들에게 제공한다......이자는 5등분하여 물리학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화학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진보를 보여준 한 사람, 심리학이나 의학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문학분야에서 이상적인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쓴 사람, 국가간의 우의 증진과 군대의 폐지 또는 삭감과 평화회의의 개최 혹은 전파를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에게 준다.“

1896년 12월 30일. 그의 사망 20일 후 스톡홀름에서 노벨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숭고한 뜻이 담긴 유언 집행은 전재산 기부에 대한 가족들의 반발로 최대 난관을 만났다. 유언집행 중지를 위한 소송이 제기된 것이다.

게다가 스웨덴 국왕까지도 “국가와 국민들에게 기여하지 못하는 노벨의 유언은 애국심이 결여된 것”이라며 비난에 가세했다. 스웨덴 학계의 입장도 비슷했다. 유언에 따라 국적을 가리지 않고 상을 준다면 주로 외국 과학자들에게 상이 돌아갈 공산이 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언대로라면 노벨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족들을 설득하기에 나선 지 2년째. 설득에 나선 라그나르 솔만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노벨재단 설립에 동의합니다.”

1898년 5월29일 마침내 노벨의 가족들이 고인의 뜻을 따르는 결정에 합의했다. 유언집행인인 라그나르 솔

만의 후속 작업이 이어지고 1900년 6월29일 노벨재단이 출범한다.

이듬해 12월 10일 노벨사망 5주기에 맞춰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이 스톡홀름의 음악당에서 거행됐다. 엑스레이를 발견한 뢴트겐(물리학상),적십자의 아버지 앙리뒤낭(평화상)등 6명이 첫수상자가 됐다. 노벨상의 신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을 바꾼 노벨상

노벨은 세금 등을 빼고 총 3122만5천크로나(2010년 기준 2억5천만달러 상당)의 재산을 남긴다. 최초의 수상자인 뢴트겐(1905,물리학상)에게는 이자 수익에서 15만800크로나(120만달러 상당), 오바마(2009,평화상)에게는 140만달러가 상금으로 주어졌다.

“위대하다. 스스로의 발명에 의해 풍요해지는 인류의 삶이여(Inventas vitam juvat excoluisse per artes.)”

노벨상 수상자의 메달 뒷면에 새겨진 고대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는 인류의 꾸준한 진보에 대한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쿼크의 존재를 밝혀 수상한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박사(2008, 물리학상)는 “나는 그리 행복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시끄러운 행사일 뿐‘이라고 시상식에 냉소를 던지기도 했다.

지난 1912년 직류와 교류전류방식의 표준을 두고 다투던 두 천재 에디슨과 테슬라는 수상을 거부해 전자발견의 원천인 에디슨효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벨재단을 당황케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근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의 표정에서 보듯 인류의 삶을 진보시켜 온 데 대한 보상은 과학자를 감격하게 만든다.

고체촬상소자(CCD)를 발명한 지 40년 만인 2009년 물리학상을 받은 윌러드 보일은 내 발명품이 나를 가장 감동시킨 순간은, CCD 카메라를 장착한 화성 탐사선이 찍은 화성 표면을 보게 됐을 때“라며 감격해 했다.

2000년 10월10일 새벽시간에 전유럽의 기자들이 텍사스 달라스로 전화를 해대게 만들고, 전 미국의 과학기자들이 쫓아가게 만든 물리학상 수상자 잭 킬비. 그가 집적회로(IC)를 발명한 것은 42년 전인 1958년이었다. 물론 킬비는 ‘달라스의 신사’답게 먼저 간 경쟁자 밥 노이스에 대한 아쉬움부터 표했다.

노벨상 수상 명사들의 상금사용내역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들여다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은 인류의 삶을 더 풍요하게 만들기 위해 상금을 다시 연구에 쏟아 붓거나(마리 퀴리), 관련기금 조성이나 기부(아웅산 수지,앨 고어,버락 오바마)를 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인슈타인처럼 이혼한 부인과 두자녀에게 모두 돌리는 인간적인 모습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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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벨상의 진정한 모습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고 다시 일어날 때까지 우리 주변에 있는 현대 문명을 만든 기술의 원천이라는 점으로 요약될 것이다.

물리학 분야만 보더라도 전자에서 시작해 반도체,X선,레이저,레이더,미사일, 우주선, 전자레인지,전구,바코드,인터넷, 전화,컴퓨터,원자로,휴대폰,칩, 우주의 원리연구 등을 망라하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