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1961년 4월 12일=유리 가가린, 보스톡1호로 지구궤도 일주

일반입력 :2010/04/08 12:11    수정: 2010/04/26 14:18

이재구 기자

■인간보다 먼저 우주를 체험한 개 ‘라이카’

스푸트니크 발사로 전세계가 경악한 지 한달 만인 1957년 11월 3일. 소련이 이번에는 궤도비행사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를 성공시켰다. 비행사는 정확하게 말하면 ‘쿠드랴프카’(‘조그만 곱슬머리의 암컷’이란 뜻)란 이름의 몸무게 5kg인 라이카종 개였다.

소련로켓책임자 코롤로프는 동물 선정에 고심을 거듭했다. 지렁이,파리,도마뱀, 쥐,토끼,개...최종적으로 개가 선정됐다. 개의 종류 선택도 쉽지 않았다. 로켓 성능을 감안, 몸무게 6~7kg정도, 흰 털의 흰 암놈이어야 했다. 털빛은 비행중 무중력상태에서의 표정과 움직임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했다. 우주비행 후 암캐의 번식에 대한 영향도 보게될 예정이었다.

라이카를 비롯, 스트렐카, 벨카, 리시치카 등 9마리가 선발됐다. 이들도 인간처럼 여압복에 산소흡입마스크를 포함한 괴상한 모양의 우주장비로 무장하고 과학자를 따라 여압실로 들어가 모의비행 테스트를 받았다.

라이카는 직경 1.7m,길이 2.2m의 산소가 든 밀폐된 원형통 속에 앉아 우주로 발사됐다. 지구궤도에 진입한 라이카는 우주공간속에서 104분마다 지구를 돌며 호흡률, 심장박동 및 생리반응 자료를 계속 보냈다. 발사 일주일 후 라이카는 자동장치에 의해 약물주사를 맞고 영원히 잠들었다.

라이카는 궤도 비행중 죽고 말았지만 우주여행에서 생물체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귀종한 전송자료는 남았다. 이어 1960년 8월 스푸트니크 5호를 타고 우주로 향한 강아지 스트렐카와 벨카는 동물로는 처음으로 궤도비행 후 ‘생환’했다.

궤도를 18바퀴나 도는 동안 캡슐 내 벨카와 스트렐카의 옆얼굴 화면이 지구로 전송돼 소련 TV화면에 비쳐졌다. 이후 2마리가 더 보내져 생물로선 처음으로 밴 앨런대를 몇 번이고 통과해도 안전하다는 것을 실증했다.

■미지의 우주에 대한 공포와 동경

“나도 좀 태워 주시오.”

1865년 프랑스 소설가 줄 베르느는 ‘달세계여행’을 내놓고 한동안 느닷없는 독자들의 우주여행선 승선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우주계획에 대한 기념비적인 청사진을 제시한 이 소설에서 그는 거대한 대포 컬럼비아드로 포탄선을 쏘아 올린다는 발상을 했다. 270m의 대포에 속이 빈 커다란 포탄선을 탄 소설속 승무원들은 발사충격으로 얼떨떨해지며 운석충돌 위험의 공포속에 무중력 상태의 공포스런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

이미 17세기에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도 우화 형식의 소설 ‘솜니움(달의 천문학)’에서 “....성층권에 들어서면 ”혹독한 추위가 닥치고 호흡할 공기가 없어진다“고 예언한 바 있었다.

실제로 1930년대 이후 인간이 기구와 비행기를 타고 확인해 보니 성층권의 상태는 상상과 예언 그대로였다.

인류는 줄 베른이 소설로 달나라에 도달한 지 100년 가까이 우주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우주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동경의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우주라는 미지 세계에의 동경은 1919년 우주로켓의 아버지 고다드가 마침내 '초고공에 도달하는 방법'이란 책자를 내놓으면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초고공에 이르기 위해 “로켓추진의 원리를 이용하면 섬광단을 달에 착륙시켜 두눈으로 이것을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통해 인류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의 대상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대기권 밖의 밀도가 예상의 6~10배나 되며, 지구대기층이 인공위성의 무선통신을 전하고,반사를 통해 지구반대쪽으로 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듬해 익스플로러호는 지구 둘레의 밴 앨런대를 확인시켜 주었다.

불안했던 인류는 인간보다 먼저 우주선에 동물들을 실어 궤도 올라갔다가 무사히 돌아오면서 비로소 우주의 무산소, 무중력, 방사선 등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지구는 푸른별...나는 불의 공속에 있다.

인류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사에 선발된 사람은 노르웨이 접경 무르만스크 공군중위 유리 가가린이었다. 그의 키는 지름 2m인 보스톡1호의 캡슐크기에 적당한 157cm였다.

1961년 4월12일 새벽 4시. 유리 가가린이 보스톡1호에 올랐다. 180~230km의 지구궤도를 90여분간 날아 돌아오면 그는 ‘인류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유인우주선의 조종사가 될 예정이었다.

바이코누르 우주발사대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가가린은 이 역사적 순간에 대해 “모스크바시간 9시7분. 나는 강력한 로켓소리를 느꼈다. 모든 것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이륙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보스토크(동방)호로 비행중에 유명한 어머니땅은 듣는다. 어머니땅은 안다“는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노래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우주로 올라간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갑자기 구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결모양으로 주름진 산 지형과 숲,강,계곡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정확한 위치는 알수 없었다. 하늘은 칠흑같이 캄캄했다. 어둠속에서 별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아주 아름다운 지평선과 지구의 활모양으로 굽은 면을 보았다. 지평선은 밝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지구표면이 은은한 푸른빛에서 보라색으로 변하더니 점점 어두워졌다. 우주에서 바라본 바다는 잿빛이었으며 지표면은 사진속의 모래언덕처럼 울퉁불퉁했다.”

그는 비행중 바이코누르 통제센터와 “지구는 푸르다...이 얼마나 놀라운가. 경이롭다.”라는 내용으로 교신했다. 유리 가가린은 96분간의 궤도비행을 마치고 대기권으로 지구 재진입을 시도했다. 그는 이 때 귀환캡슐 창문 밖의 모습을 불꽃의 타오르는 빛이 우주선의 둘래에서 날뛰는 것이 보이고 나는 불의 공에 싸인채 쏜살같이 떨어져 나아갔다“고 표현했다. 20분 후 세계최초의 유인우주비행사가 소련 사라토프지역 엔젤 남서쪽 26km지점에 무사히 착륙했다.

■스푸트니크보다 더 컸던 보스토크 충격

소련 유인우주선의 지구궤도 일주 성공소식이 미국민에게 준 충격은 스푸트니크 때 보다도 훨씬 컸다. 인간은 커녕 동물도 지구궤도에 올리지 못한 게 미국의 수준이었다.

가가린의 유인 우주비행 하룻 만에 미의회 과학우주위원회는 소련을 따라잡기 위한 전폭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뉴스에 신중하게 반응하면서 대응을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인 20일 케네디대통령은 존슨 부통령에게 미국의 우주프로그램상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메모는 아폴로프로그램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입니다. 우주프로그램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극적 결과를 약속할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케네디대통령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오직 미국인을 달에 보내는 것’이 그 목표였다.

존슨 부통령의 메모는 “유인달착륙선은 미국이 미래에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므로 미국이 먼저 달성하려 나서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백악관 내부 토론도 있었다.

1961년 5월25일 케네디대통령은 하원 합동연설에서 저 유명한 아폴로계획 지원연설을 한다.

“나는 이 나라가 스스로 목표를 성취해 가면서 60년대가 가기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고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이 기간중 하나의 우주프로젝트도 인류에게 더할 나위없이 중요한 것이 될 겁니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과 비용도 기꺼이 지불될 것입니다.“

그의 연설이 의미하는 것은 기술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 내야 하며 평화시기로서는 가장 많은 비용인 240억달러를 투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폴로 피크시점에 미항공우주국(NASA)은 2만개 기업과 대학에서 40만명의 인력을 지원받았다.

보스토크로 촉발된 미국의 반응은 미 소 우주경쟁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관련기사

이는 1989년 소련제국이 붕괴하기까지 30여년 간의 냉전과 우주경쟁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미 소 우주경쟁의 진정한 시작이었다. 1989년 소련제국이 붕괴하기까지 30여년간의 냉전과 우주경쟁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