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 벨, 사상최대 발명가 또는 사기꾼?

1876년 3월10일: 벨 전화를 발명하다

일반입력 :2010/03/04 14:34    수정: 2010/03/19 16:49

이재구 기자

왓슨 이리와 주게

1876년 3월10일 보스턴. 영국태생의 한 젊은이가 옆방에 있는 조수에게 전화기로 소리쳤다. “왓슨 이리 와 주게. 나 좀 보자구.”

진동판의 떨림이 회로의 전기저항을 변화시키면서 물속의 바늘을 떨게 했고 소리는 송화기를 통해 전선을 타고 저항을 전달했다. 조수는 옆방의 다른 쪽 수신기로 이 말을 뚜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실용 전화기가 등장해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스물 아홉 살의 이 젊은이의 이름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었다. 그는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를 획득한 지 사흘 만에 발명가 엘리샤 그레이의 물 송화기와 같은 설계방식의 통화에 성공했다.

이미 사흘 전 전기를 일으키는 방법에 의한 음성 또는 소리전신에 대한 방법과 장치로 미국특허를 받은 그였다.

하지만 그는 특허를 확보한 3월 이후 전자기방식의 전화기 성능향상에 집중했고, 이후 이어진 일반 대중과 상업용 시연에서는 새 방식만을 보여주었다.

벨은 제대로 된 전화를 만들기 위해 단어 발성시 종이가 떨리는 형태를 그대로 전기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았다.

이 젊은발명가는 사람이 후두(喉頭)나 인두(咽頭)의 음성상자를 닮은 송화기에 대고 말하면 송화기가 불규칙하게 떨리면서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떨리는 전선을 따라 전류를 밀어 보냄으로서 불규칙한 떨림의 형태인 음성을 전화기로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었다.

■전화, 18년간 600건의 소송으로 얼룩진 발명

“나는 알콜 중독자로서 남북전쟁 당시 군 복무시 피고 그레이엄 벨 측의 마르셀러스 베일리 변호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제나스 피스크 윌버 당시 특허심사관의 이 말에 법정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벨과 같은 날 특허청을 찾았던 엘리샤 그레이가 제기한 특허도용 소송법정에서였다.

놀라운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베일리 변호사에게 엘리샤 그레이의 특허출원내용을 보여 주었고, 워싱턴에 온 벨에게 보여주었다고 털어 놓았다. 심지어 벨이 그 대가로 자신에게 100달러를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벨은 이날 보스턴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그레이의 특허보호신청에 있는 것과 비슷한 다이어그램을 노트북에 그리면서 일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버의 증언에 대해 벨은 “그것이 그레이의 서한에 대한 것이긴 했지만 일반적 조건의 특허에 대한 토론만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는 경쟁 상대의 세부 기술사항을 알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세상의 눈길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1887년 1월 13일 미국정부가 벨에게 허여한 특허를 잘못된 것이라며 취소하려 한데 이어 수백번의 소송과 판결이 이어졌다.

특허가 만료될 때까지 18년간 그가 세운 벨텔레폰컴퍼니는 600건이상의 전화발명 권리를 주장하는 법적소송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소송을 건 엘리샤 그레이와 돌비어가 벨에게 보낸 개인편지에서 그가 전화를 먼저 발명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벨이 전화발명과 연구를 너무나도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밟아 온 가운데 나온 잡음인 만큼 최초발명의 진실을 두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내력있는 집안의 사연있는 발명-전화

우연치고 기묘한 인연이었다. 영국 에딘버러에서 태어난 벨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음성 관련 일을 해왔다. 할아버지는 런던에서 그의 삼촌은 더블린에서,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에딘버러에서 모두가 웅변연설법 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젠 그도 보스턴에서 농아대상의 교육을 하게 됐다.

어머니와 부인은 귀머거리였고 그는 더욱 더 음성송수화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이것으로 장인에게 성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벨은 수화를 배웠고 침묵속에서 말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적절한 분명함으로 그녀가 들을 수 있도록 어머니의 이마에 진동으로 말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는 벨 형제에게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로봇 인형 오토메이톤을 보여주었다. 알렉의 형은 목과 후두를 만들었고 그는 놀랍도록 사람과 비슷한 발성을 할 수 있는 두개골 구조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소년은 조심스레 입술소리를 적용시켜 보았으며, 이 기기가 윈드파이프를 통해 울리는 소리를 공기로 내보낼 때 나는 소리는 '엄마(Mama)'라는 소리로 들릴 정도로 정교한 것이었다.

이후 벨은 농아의 학부형인 가디너 허바드와 토머스 샌더스에게 멀티리드기기를 이용해 전신선에서 다양한 가닥의 소리를 보내는 자신의 연구를 소개한다. 부자인 두사람이 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결정한 것은 아주 적극적이었고 자연스러웠다.

1875년 3월 벨과 그의 변호사 폴락은 유명한 과학자이자 스미소니언과학관장인 조셉 헨리를 방문한다.

벨이 그에게 필요한 아이디어가 없다고 했을 때 미국에서 대형 전자석을 처음으로 만든 그는 “해보는 거야”라며 벨을 격려하며 힘을 보태준다.

벨은 음파에 대응하는 파동전류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하프처럼 다양한 주파수에 맞춰져 떠는 다양한 금속리드가 파동전류를 소리로 바꿀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같은 원리는 결국 그에 의해 실현된다.

통신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명

1876년 8월3일 벨은 캐나다에 있는 자신의 가족농장으로부터 8km 떨어진 마운트 플레즌트 전신국에서 전화실험이 준비됐다는 전신을 동네사람들에게 보낸다.

호기심많은 구경꾼들이 전신국에 꽉 들어찬 가운데 희미한 응답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밤 그의 가족과 손님들은 집에서 6km 떨어진 곳에서 온 전화를 통해 그쪽 사람들이 책읽는 소리와 노래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전화기의 위력을 과시하기에 충분한 실험이었다. 1874년 한창 유선전신이 뜰 때 윌리엄 오톤 웨스턴유니언 사장은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는 “상업거래의 신경망이라 할 첨단 시스템”을 거느린 산업의 패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전신시대의 절정을 맛보고 있던 그에게 벨과 그의 후원자들은 10만달러에 전화특허를 팔고자 했다.

오톤은 “전화는 아무 것도 아닌 장난감일 뿐”이라며 일언지하에 이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꼭 2년 만에 벨의 전화 특허권 가치는 2천500만달러 이상이 되면서 하늘을 찔렀다.

벨은 더 이상 전화특허를 팔고 싶어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투자자들은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오톤이 “그 장난감같은 특허”를 구매하지 않은 것은 경영 역사상 최악의 판단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

이제 벨은 새로운 발명품을 일반대중과 과학계에 소개하는 강연으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독립100주년기념박람회에서 그가 시연한 전화는 전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2세는 특별히 전시장을 방문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또 전자를 발견한 동향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톰슨도 시연을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전시회는 혁명적 통신기기인 전화가 전세계에 보급되는 초석을 놓는 자리로 매김했다.

벨전화회사는 1877년 만들어져 1886년에는 미국내 15만 가입자를 유치했으며 전화는 가장 성공적인 제품의 하나로 부상했다. 1915년 1월 25일 벨은 최초의 미대륙횡단 전화를 성공적으로 개통시켰다. 지금은 AT&T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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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 4일 오후 6시 25분. 당뇨와 악성빈혈로 투병중이던 벨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정상 운영되던 캐나다와 미국의 전화가 1분간 통신을 중단하며 이 거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영국,캐나다,미국정부는 각각 영국출신으로서, 캐나다인으로 살다가 미국으로 귀화한 벨을 여전히 자국의 가장 위대한 국민 가운데 한사람으로 꼽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