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레이더, 전쟁이 낳은 놀라운 발명

1935년 2월 26일: 왓슨 와트, 세계최초의 레이더 가동

일반입력 :2010/02/25 16:19    수정: 2010/03/03 14:13

이재구 기자

■나찌에게 '불친절한 접대'를 하다

1939년 5월 독일 공군 소속 볼프강 마티니 대령은 영국의 대공 방어체계 시험을 위해 제펠린선을 띄웠다. 독일군은 몰랐지만 이 비행선이 도버해협을 채 건너기도 전에 영국 레이더 기지국에서 쏘아보낸 전파신호는 이미 이 알루미늄코팅 물체에 닿아 있었다.

독일군이 영국해안을 정찰하는 동안 제펠린선은 육중한 몸체를 구름 속에 감추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영국의 레이더 기지국, 코드명 ‘체인 홈’인 레이더기지국 철탑들은 전신 라디오탑처럼 보이려고 작동을 멈추고 있었다. 1940년 7월 영국의 레이더 방어현황에 대한 독일 공군의 최종보고서에는 체인 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 해 여름 서유럽 지역 대부분을 집어삼킨 독일은 이제 도버해협 끝자락에 몰려와 진을 쳤다. 독일공군은 영국본토를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드디어 D데이인 8월 13일 새벽. 영국군은 프랑스 아미앵,디에프,셸부르 상공으로 떠오른 독일비행 편대들의 상황을 손금보듯 들여다 보고 있었다.

독일은 런던을 초토화하고 영국의 항서를 받아낼 꿈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수백대의 독일 융커스기가 영국상공에 도착해 전격공습을 벌이려는 순간 영국 공군의 스핏파이어(spitfire)가 그들을 에워싸고 불을 뱉어냈다. 이후 수차례 더 이어진 불시 공습시도 역시 똑같은 식으로 번번이 실패했다.

영국은 당시 상황을 “영국의 접대 위원회는 최고로 불친절한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온 방문객들을 돌려 보냈다”고 표현했다. 가을 폭풍이 강해진 10월 11일 독일은 당초 계획했던 영국 상륙계획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했다.

■죽음의 광선을 만들 수 있는가?

체인홈의 레이더 발신기는 110m 높이의 금속타워에 전선들로 엮여져 있었다. 그리고 대지위에 20-50 MHz에서 작동되는 전파에너지를 봇물처럼 쏟아냈다. 체인홈을 만든 주인공은 20년간 영국 기상연구소에서 일하던 하급 공무원 로버트 왓슨 와트였다.

체인홈은 그의 기상연구소 생활 20년째 되는 해 1월 런던에서 날아온 한통의 전문으로부터 시작됐다.

항공부 고위층이 ”라디오파 발신기를 통해 끔찍한 살인광선을 쏘아올려 비행기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가능한가?“라고 문의해 온 것이었다.

사실 왓슨 와트는 번개에서 나오는 전파신호로 천둥의 위치를 찾아내고 정확한 방향을 알기위해 빙글빙글 도는 안테나를 사용하는 등 전파와 친숙했다. 1923년에는 이 신호를 나타내기 위해 오실로스코프를 도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런던 항공부에서 온 질문의 답신이 ‘무조건 불가’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새로 온 아놀드 윌킨스라는 동료를 통해 비행기 방향으로 라디오파를 쏘면 금속제 비행기에서는 전파를 반사시켜 되돌려 보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원래 전파세기의 1천분의 1만이 6천km 밖의 비행기 금속전자에 가 닿는다 하더라도 반사파 탐지에는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증기기관 발명가 제임스 와트의 직계후손인 와트는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공군대장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1935년 2월 26일 이른 아침 데번트리. BBC방송탑 근처 풀밭에 모인 참관자들의 머리위로 독일군 대신 영국왕립공군(Royal Air Force·RAF)폭격기 한 대가 날았다. 폭격기는 1만 2천km 밖에서부터 탐지되었다. 실험은 성공이었다.

■독일의 레이더 개발과 함부르크 대공습

1940년 6월 서부전선에서 12m 펄스신호가 발생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조사한 독일은 그 때까지 알고 있던 영국의 라디오기지국이 사실은 레이더기지국이었임을 간파한다.

우연히도 이 즈음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던 독일의 레이더 연구가 본궤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드디어 1939년 독일은 고대 북구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프레야(Freya)'라는 암호명으로 레이더를 개발해 히틀러에게까지 보고하고 운영에 들어갔다.

이후 연합군이 유럽 하늘로 날아오르기만 하면 독일공군이 등장했고 독일군의 대공포화는 정확히 연합군 비행기를 겨눴다. 1942년 2월 어느 날 밤. 영국군은 독일이 송수신기를 동시에 갖춘 레이더를 갖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하기 위해 나찌 치하 프랑스로 칩입, 이른바 ‘뷔츠부르크 레이더’를 확보한다. 결론은 “독일은 어떤 바보라도 손쉽게 다룰 수 있는 튼튼한(시스템 설계를 전환하기 힘든) 초단파를 사용하는 우수한 레이더 시스템을 개발해 냈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프레야의 주파수를 파악, 레이더교란효과를 극대화한 크기의 알루미늄 조각 ‘채프(chaff)’를 뿌리며 함부르크 상공으로 진입했다. 레이더망은 하늘을 빼곡이 메운 수많은 비행기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레이더망에 따라 움직이는 독일의 대공포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영국공군은 이 도시의 유보트기지 및 공장 대신 민간인 밀집거주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1937년 스페인 게르니카 마을에서의 독일군 공습을 넘어서는 가공할 만한 학살이었다. 그곳은 전파의 성질을 최초로 밝힌 과학자 하인리히 헤르츠의 고향이기도 했다.

전쟁이 낳은 위대한 발명 ‘레이더’의 양면성

2차대전 중 발명된 레이더는 이후 인류에게 원자폭탄 이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 놀라운 과학적 발명품임을 증명해 가기 시작한다.

당초 전쟁용으로 개발됐던 레이더기술은 이제 군사용으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기상학자들은 이를 천둥과 토네이도, 겨울의 폭풍 등 단기 기상예측을 하는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질학자들은 땅을 파고드는 레이더 전파의 성질을 이용해 지표면 지도제작에 이를 활용했다.

수많은 항공기와 우주선에 레이더가 실려 지구는 물론 달과 지구이외의 행성지도 제작에도 사용됐다.

레이더가 발명된 지 얼마 안된 1946년 달의 관측이 이뤄졌고 달 표면 지도에 이어 금성,화성,수성,목성,토성의 지도가 그려졌으며 회전주기도 알아낸다.

토성과 천왕성의 표면 및 카시니 위성에 의한 관측성과도 위성 탑재 레이더의 개가다.

레이더장비가 만들어진 과정에서 나온 기술은 인체 내부장기 촬영,기상학자의 원거리 강수량측정 등에도 활용되고 있다.

특히 초기 레이더용 기기로 개발됐던 마그네트론은 여전히 각 가정 주부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조리용 전자레인지에 사용되고 있다.

인류는 레이더 발명에 대응, 레이더에 들키지 않는 스텔스(stealth)비행기의 발명도 함께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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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기는 적 센서로부터의 감지 추적 또는 공격당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비행기 날개 표면을 서로 직각으로 구성하고 전파 흡수 페인트와 그래파이트 재질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는 레이더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이 스텔스비행기란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