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IT업계, '경쟁의 국경'이 없어진다

영역간 경계 붕괴…사활건 생존경쟁 후끈

일반입력 :2009/03/10 17:15    수정: 2009/03/10 18:04

황치규 기자

세계 IT 시장에서 업체간 경쟁을 구분짓던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다.

거물급 IT업체들이 대거 사업 확장에 나서면서 속칭 각자 나와바리(구역의 일본말) 개념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특정 분야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반도체, 컴퓨팅, 통신, 소프트웨어 분야 가리지 않고 경쟁의 경계가 없어지는 현상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네트워크 공룡' 시스코는 서버 시장에 뛰어들고 휴대폰이 '주특기'인 노키아는 휴렛패커드(HP), 델이 버티고 있는 노트북PC 시장을 노리고 있다. PC업체들도 '블루오션'으로 떠오른 스마트폰 시장에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PC와 휴대폰 시장은 구분짓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반도체 시장에서도 경쟁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너졌다. 어제의 동지였던 인텔과 엔비디아는 순식간에 으르렁거리는 '앙숙'으로 돌변했다. 인텔이 엔비디아의 구역을 기웃거리면서 둘 사이는 지금 '사생결단'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다.

각자 구역에서 따로 놀던 시스코와 'SW제국' 마이크로소프트(MS) 사이에도 긴장기류가 포착됐다. 최근들어 시스코가 통합 커뮤니케이션(UC) 사업을 강화하면서 MS와의 경쟁이 관전포인트로 급부상했다. 시스코를 놓고 레드햇, IBM에 이어 또 하나의 '거물급 MS 대항마'가 나왔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이같은 현상은 IT 융합(컨버전스)이 가속화되는데 따른 시장 통합으로 벌어진 것일 수도 있고 성장의 한계를 느낀 공룡 기업들이 매출 확대를 위해 남의 땅을 넘보면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 두가지 요인이 함께 버무려져 연출된 '살벌한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경쟁의 선이 무너지면서 앞으로 IT업계는 과거와는 다른 경쟁 판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 분야에서 경쟁하게 됐다고 해서 갖고 있던 인연을 확 끊어버릴 수는 없다. 그래봤자 서로가 손해다. 이에 따라 싸우면서 협력하는 이른바 '코피티션'이 대세론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쟁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세계 IT시장. 그속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장면들을 정리해봤다.

휴대폰과 PC업체들의 결투

그동안 휴대폰은 휴대폰이고 PC는 PC였다.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묘해졌다. 스마트폰 맹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PC업체들은 스마트폰을 'PC의 자손'쯤으로 보고 있다. 휴대폰 진영은 스마트폰에 대해 '휴대폰과 형제'란 인식을 갖고 있다. 이쯤되면 '누가 스마트폰과 가까운가?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최근 PC와 휴대폰 진영이 스마트폰을 놓고 사활건 경쟁에 들어간 것은 이같은 상황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에이서, HP 등 내로라하는 PC업체들이 이미 스마트폰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상황이다. 아이폰 신화를 쏘아올린 애플도 출신성분만 놓고보면 PC쪽에 분류된다.

PC와 휴대폰 진영간 경쟁은 스마트폰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노트북으로 전선이 확대될 분위기가 풍긴다. 세계 최대 휴대폰 업체 노키아는 이미 노트북 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음을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노키아가 넷북으로 대표되는 미니노트북 시장에 뛰어들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PC와 휴대폰 업체간 경쟁이 앞으로 전면전 구도로 흘러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MS와 시스코, 숙적 관계로 돌변?

마이크로소프트의 최대 경쟁상대는? MS 자신이란 말도 있다. 컴퓨터월드에서 나온 얘기인데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MS는 '네트워크 공룡' 시스코에도 신경을 좀 써야 할 듯 하다. 시스코는 최근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협업 기술을 결합해 데스크톱 시장에서 MS가 가진 지배력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결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협업SW 분야다.

시스코는 지난해 포스트패스와 재버를 인수했다. 포스트패스는 익스체인지 사용자들을 시스코가 보유한 리눅스 기반 익스체인지 클론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재버는 인스턴트 메시징 솔루션이다. 포스트패스와 재버를 통해 시스코는 통합 커뮤니케이션(UC) 시장에서 MS와 자웅을 겨뤄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앞서 인수한 웹기반 협업 서비스 웹엑스까지 합칠 경우 협업 SW시장에서 MS와 시스코간 대립각은 더욱 날카로와진다. 시스코가 MS와 싸울 분야는 애플리케이션 뿐만이 아니다. 시스코는 리눅스를 앞세워 MS를 노리고 있다. 시스코는 이미 리눅스 커널의 핵심 컨트리뷰터다. MS 윈도 운영체제(OS)에 대한 의존도 크지 않다. 인텔이면 몰라도 시스코에게 MS 윈도는 별로 아쉬울게 없다.

반도체 시장, 적자생존의 시대로

그동안 인텔의 가장 큰 경쟁상대는 AMD였다. 그러나 이제 인텔의 눈에 AMD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닌 듯 하다. 무섭게 치고올라오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대신 엔비디아, ARM, 퀄컴이 인텔의 '숙적'으로 급부상했다.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그래픽 칩셋으로 유명한 엔비디아가 인텔이 틀어쥔 x86 마이크로프로세서(CPU) 시장 진출을 검토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x86칩을 향한 엔비디아의 이번 행보는 인텔과의 직접적인 경쟁이 가열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두 회사는 그동안 각각의 영토에서 맹주로 군림해왔다. 인텔은 x86프로세서, 엔비디아는 그래픽칩의 강자로 통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칩 시장이 통합되는 분위기로 흘러가면서 경쟁이 불가피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인텔과 AMD는 휴대폰 등 모바일 기기 시장을 겨냥해 x86 프로세서과 그래픽칩까지 통합한 시스템 온 칩(SoC)를 선보일 계획이다. 엔비디아의 경우 이미 테그라로 불리는 모바일 기기용 Soc를 판매하고 있다.

인텔과 엔비디아간 신경전은 법적 분쟁으로도 비화됐다. 인텔은 2004년 엔비디아와 맺은 라이선스 협정은 차세대 프로세서 기술인 '네할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엔비디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엔비디아는 쇠약해지는 CPU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GPU 분야 혁신을 질식시키려는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인텔을 비난하고 나섰다.

모바일칩 시장에서도 경쟁의 선은 허물어졌다. PC를 주름잡던 인텔이 ARM이 호령하는 모바일 시장에 전력을 전진배치하면서 두 회사간 사활건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ARM도 휴대폰을 넘어 인텔 아톰이 강세인 넷북으로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맞불을 놨다. 이에 따라 두 회사는 서로가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를 펼치게 됐다.

시스코가 서버 시장에 들어온다?

공식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는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 하다. 시스코가 마침내 x86서버 시장에 진출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스코는 데이터센터용 블레이드 서버 카드를 뽑아들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되면 판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HP, IBM, 델 등 기존 서버 업체와 시스코간 경쟁이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네트워크쪽에서 시스코에 힘을 실어줬던 IBM과 시스코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관련기사

이를 감안한 듯 시스코는 서버 업체들을 자극하는 표현은 자제하는 모습이다. 유니파이드 컴퓨팅란 말을 들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유니파이드 컴퓨팅에서 서버는 한 부분일 뿐이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시스코는 HP, IBM, 델 등 파트너들의 주무대인 서버 시장에 직접 출사표를 던진다.

컴퓨팅, 소프트웨어, 서버, 통신쪽에서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경쟁의 재편. 이쯤되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경쟁에 대한 고정관념은 폐기처분해야 할지 모른다. 그만큼 변화는 지금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