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LG' 이끈 구본무 회장이 걸어온 길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전자-화학-통신 3개 핵심사업 구축

디지털경제입력 :2018/05/20 12:45    수정: 2018/05/20 12:48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야 하겠습니다."(1995년 2월 22일 LG그룹 제 3대 회장에 취임한 구본무 회장)

20일 별세한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난 1995년 2월2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회장 취임식을 갖고 취임사를 통해 이 같이 말했다.

‘초우량 LG’를 강조했던 구 회장은 그로부터 23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럭키금성(LG그룹의 전신)'을 '글로벌 LG'로 탈바꿈했다.

고 구본무 회장은 1995년 2월2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LG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사진=LG)
고인이 생전에 아버지 구자경 LG그룹 회장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진=LG)

■ 토종기업 럭키금성…'글로벌 LG'로 탈바꿈한 일등 공신

과장부터 출발해 20년간 영업과 수출, 심사, 기획업무 등을 두루 거친 구 회장은 능력을 충분히 검증 받은 '경영 3세'로 평가받는다.

고인은 지난 1945년 구자경 LG그룹 회장(2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즉, 고인은 LG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손자다. 연세대학교와 미국 애슐랜드 대학교를 졸업한 구 회장은 1975년 LG화학 심사과 과장으로 그룹에 입사했다. 이후 1981년 LG전자 이사로 승진, 1984년 LG전자 일본 도쿄 주재 상무를 거쳐 1986년 회장실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룹 경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1989년 LG그룹 부회장에 오른 구 회장은 그룹 명칭이었던 럭키금성을 LG로 탈바꿈한 일등 공신이었다. 당시 주변에선 왜 국민들에게 익숙한 CI를 바꾸려고 하느냐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대다수였지만, 구 회장은 뚝심있게 CI 변경 작업을 추진했다고 전해진다. 구 회장의 결단력은 후일 LG가 국내 시장에 국한된 기업체가 아닌, 글로벌 무대에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LG의 심볼마크인 '미래의 얼굴'을 최종 승인한 것도 구 회장의 결정이었다.

구 회장 취임 당시만해도 30조원 대에 불과했던 LG그룹의 연매출은 지난해 160조원대로 5배 넘게 성장했다. 이 같은 눈부신 성장엔 구 회장의 '외유내강(外柔內剛)' 리더십이 한몫을 했다는 평가다. 평소 온화한 품성을 지닌 구 회장은 발전 가능성이 보이는 미래 먹거리 사업에 그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추진력을 발휘해왔다.

2002년 10월 구본무 회장이 전기차배터리 개발을 위해 만든 시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는 모습. (사진=LG)

■ LG전자·화학·유플러스 이뤄낸 장본인…반도체 사업은 '아픈 손가락'

구 회장은 모든 기업들이 불황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당시에도 '인재경영'과 '미래 투자'를 꾸준히 강조해왔다. 그는 지난 2008년 11월 "경영 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기존 인력을 내보내선 안 된다"며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것은 경기 여건에 관계없이 장기적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과감한 투자 스타일과는 달리, 인사 관리에선 '구관이 명관'이라는 가치를 중요시한 셈이다.

이어 이듬해인 2009년엔 "불황을 극복하고 시장의 리더로 발돋움한 기업들의 공통점은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며 "연구개발(R&D), 마케팅 분야의 유능한 인력 확보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만의 차별화 된 역량을 키워갈 수 있는 R&D 투자는 줄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이 인재경영과 미래를 위한 선제적 투자로 키워낸 사업들은 현재 LG그룹의 효자들이 됐다. 그는 그룹의 핵심 사업으로 전자와 디스플레이, 화학, 통신 사업을 지정, 그룹 내 모든 투자와 역량을 쏟아부어 사업 체질을 개선했다. 이는 오늘날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

때로는 아픔도 있었다. 구 회장이 한 편으로 애지중지 키워냈던 반도체 사업이다. 그는 지난 1997년 외환위기(IMF) 시절 LG반도체를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전신)에 통째로 넘겨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구 회장은 현대전자과 LG반도체 통합 이후에도 경영권 확보 의지를 비쳐왔다. 2년 뒤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에 들어간 현대전자는 사명을 하이닉스로 바꾸고 SK텔레콤에 인수돼 국내 반도체업계 2위인 SK하이닉스가 됐다.

구본무 회장이 2014년 3월 연구개발 성과보고회에서 연구과제인 LG전자 올레드TV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LG)

■ '인재경영'과 '미래투자'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

2003년 당시엔 파격이었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결정한 사람도 구 회장이었다. 이는 국내 대기업 역사상 최초의 결단으로 기록됐다. 구 회장은 IMF 이후 침체된 경영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선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다짐했다. 당시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은 문어발식 순환출자와 확장으로 어려웠던 시기였다. 지주회사인 ㈜LG와 자회사들간의 수직적인 출자구조로 지배구조를 바꾼 고인의 결정은 수많은 자회사들이 각자의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고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고 미래 먹거리 사업에 과감히 투자했다. 구 회장이 마지막으로 들여다 본 것은 자동차산업과 에너지산업의 가능성이었다. 그는 자동차 전장부품과 에너지 사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또 국내 최대 규모의 R&D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 파크'도 조성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20일 별세했다. (사진=LG)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으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LG'로 우뚝 세운 고인은 2015년 LG복지재단을 통해 ‘LG의인상’을 제정해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기도 했다.

구 회장은 우리 사회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하자"는 뜻으로 우리 사회의 의인들을 지원하는 ‘LG의인상’을 만든 것이다.

현재까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소방관, 경찰, 군인 등 ‘제복 의인’부터 얼굴도 모르는 이웃 위해 위험을 무릅쓴 크레인/굴착기 기사와 같은 ‘시민 의인’ 등 70명이 넘는 ‘LG 의인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구 회장은 사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승부사였지만, 평소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우러나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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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회장의 존중과 배려는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려고 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항상 약속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 상대방을 기다리는 등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히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은 ‘LG 테크노 콘퍼런스’에서 만난 대학원생들과 “다음에 다시 한 번 자리를 만들겠다”며 식사 일정을 약속했는데, 이후 2013년 5월 구 회장이 방미 경제사절단으로 가게 되면서 일정이 겹치게 됐다. 구 회장은 이 대학원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틀에 걸친 빡빡한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잠깐의 휴식도 마다하고 곧바로 귀국했다고 한다. 당시 구 회장은 대학원생들에게 “신용을 쌓는 데는 평생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피곤했지만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어제 밤에 귀국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