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없으면 우리가 죽습니까?”

[이균성 칼럼] 네이버 경영회의 상상

데스크 칼럼입력 :2018/05/10 13:47    수정: 2018/11/16 11:21

개나 돼지로 산 적이 없으므로 그들도 상상을 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상상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이 글은 그 특권에 따른 것이다. 모든 게 다 상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최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네이버는 필시 경영회의를 소집했을 것이다. 한두 차례가 아닐 수도 있다. 남들 다 쉬는 지난 연휴기간에도 책임 큰 사람들은 아마 다 모였을 수 있다.

자리는 엄중하고 분위기는 엄숙했을 것이다. 눈동자 굴리기도 벅찰 만큼 공기는 냉랭했을 것이고. 왜 아니겠는가. 회사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져있는데. 밖으론 적의 공격이 거세다.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한국에선 네이버가 크다고 하지만 세계 시장에선 그들과 비교조차 안 된다. 모바일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한국 시장에서도 점차 밀리고 있다. 싸움은 언제나 두렵고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

네이버 분당 사옥.

사람들은 모른다. 구글과 유튜브와 페이스북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스스로 그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뿐 단 한 번도 그들과 대적하려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마귀의 자세로 수레바퀴를 막으려는 무모함을 가진 자만이 그 두려움을 안다. 수레바퀴에 깔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에. 그뿐이면 차라리 괜찮다.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는 것 또한 멋진 삶이고 죽음이므로.

죽음보다 견딜 수 없는 건 우군의 비아냥이다. 네이버에겐 그 우군이 고객이고 네티즌이며 수많은 협력사이자 정책당국일 것이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구글과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맞서 싸운 적이 없다. 그저 저들의 장점과 네이버의 단점만을 비교해 비판할 뿐이지. 댓글 조작 사태로 그 비아냥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래도 화낼 수가 없다. 따지거나 변명할 수도 없다. 사마귀의 숙명이다.

그들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셈이다. 극단적인 비난이 난무할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이전 칼럼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네이버를 병렬로 놓았던 까닭은,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자의 깊은 고독을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그 자리가 바로 상상할 줄 아는 자들이 머무는 ‘절망의 끝자리’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그 자리에서 감히 누가 먼저 입을 뗄 수 있겠는가.

죽음 같은 침묵은 길었을 거다. 그 침묵은 인간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다행스러운 것은 생사를 갈라야 할 그게 그들의 목숨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건 단지 뉴스였을 뿐이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누군가는 말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물었을 거다. “뉴스가 없으면 우리가 죽습니까?” 사실 그 자리에선 이 질문만이 필요했을 수 있다.

뉴스는 네이버에게 한때 동행하는 벗과 같았다. 인터넷 초기 한글로 된 웹 정보가 턱 없이 부족할 때 구글에 맞서는 ‘한국형 검색 사이트’를 만들기 위해 뉴스보다 나은 '정보의 젖줄'을 찾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행은 질곡이 됐다. 언론은 뭔가를 뺏긴다고 생각했고 끊임없이 네이버를 압박했으며 네이버는 지속적으로 양보해왔다. 뉴스는 여전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텨오던 네이버에게 “뉴스가 없으면 우리가 죽습니까?”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한 건 두 말 할 것도 없이 드루킹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듯 네이버 또한 드루킹 이전에도 이러저러한 잘못을 했을 것이다. 또 그것에 대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두 다 평소 인정하고 반성했을 터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온갖 권력이란 권력이 모두 다 달려들어 네이버를 해체할 기세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답했을 거다. 트래픽이 얼마나 줄고 이용자가 얼마나 빠져나갈 거라고. 그건 본질을 벗어난 답변이다. 이익을 따지는 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또 대답했을 것이다. “부분적인 양보로는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맞다. 누군가 “뉴스가 없으면 우리가 죽습니까?”라고 물었던 건 실리를 따지지 말고 아낌없이 내려놓음으로써 새 활로를 뚫자는 뜻이었으리.

그중 누군가는 공개석상에 나와 모바일 홈에서 뉴스를 없애고, 자체 인력으로 편집하지 않으며, 편집권과 댓글 정책은 언론에 돌려주고, 원하면 아웃링크도 해주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다 내려놓은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뉴스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뉴스를 네이버에 공급하고 싶은 언론이 있고 네이버에서 읽고 싶은 독자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이든 독자든 원하면 받되 원치 않으면 강요치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래 왔다. 지금도 심사 때마다 네이버에 들어가기 위해 한 번에 수 백 곳의 언론이 신청을 하고 있다. 당연히 그걸 물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뉴스의 가치는 재평가될 듯하다. 갈수록 콘텐츠는 다양해지는데 뉴스가 전부인 것 같은 생각과 그런 모습의 사이트는 드루킹이 아니었어도 시대착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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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없으면 우리가 죽습니까?”라고 물었던 이는, 단지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시달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마귀의 자세로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이라는 수레 같은 주적(主敵)과 밤낮 없이 싸우다, 계속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 수레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해도 부족한 시간에 왜 우리는 모두 붕어빵 같고 별 재미도 없는 뉴스를 갖고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어야하지?

그는 스스로 수없이 반복해 생각한 뒤에 마침내 그 질문을 세상에 꺼내놓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