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균성 칼럼] 4차산업혁명의 길

데스크 칼럼입력 :2017/11/21 17:07    수정: 2018/11/16 11:24

요즘 학생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공무원”이라는 답이 가장 많다지요. 아마 속으론 의사나 변호사 혹은 교수라고 말하고 싶은데 여러 이유로 공무원이라고 대답했을 수 있을 겁니다. 의사나 변호사 그리고 교수보다 공무원 되기가 조금 더 쉬운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겁니다. 학생들의 이런 대답은 사실 어른들의 오랜 설득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지요.

부모와 학생들은 그러면서도 현재의 주입식 암기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전문가들도 이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교육 제도 개혁은 늘 사회적 과제이지만, 제대로 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입시는 곧 경쟁이고 경쟁은 곧 학생을 차별화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지요.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학생을 차별화 하는 한 교육을 크게 바꿀 방법은 없겠지요.

위에 열거한 직종들을 통틀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다들 지식인이 되고 싶어 하면서도, 거기에 맞게 제도화된 교육은 반대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걸까요.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知識)의 가치와 효용성에 큰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그 변화에 대해 사회적으로 같이 공감하고 싶은 욕심에 다소 논란이 될 제목을 달아보았습니다.

지식(知識)이란 과연 뭘까요. ‘미래를 보는 창(窓)’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시(詩)적인가요. 은유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식을 그렇게 믿어왔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랬지요. 지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더 나은 미래를 열 수 있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던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식은 영·원·히 ‘미래를 여는 창’으로서의 구실을 할까요. 대답이 쉽지만은 않네요.

그렇잖은 징후들이 속출하기 때문입니다. 임시강사로 떠도는 박사 인력들, 폐업 위기에 몰린 한의사들, 판례 연구보다 영업에 더 신경 쓰는 변호사들......얼만 전까지만 해도 국가가 부여하는 이들 지식인에 대한 라이선스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먹으면서도 명예까지 얻는 보증수표’였지요. 지금도 분명 보통사람보단 낫긴 하지요. 하지만 라이선스 기득권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한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지식의 종말’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성급한 이야기겠지만 지식의 효용가치와 희소가치가 급락하고 있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처럼 보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지식의 운명이 그런 것 같습니다. ‘암기된 과거’로서의 ‘앵무새 지식’이 설 땅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지식은 이제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물이나 공기처럼 어디에나 널려 있고 아무 때나 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많은 시간을 들여 암기한 과거에 대한 지식은 더 이상 특별 대접을 받아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죠. 그냥 기본이고 교양일 뿐인 거죠.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금방 구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모두가 지식인인 세상이 되어버린 겁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본질이 그러해 보입니다. 의식주는 물론이고 지식까지 모든 게 부족함이 없는 세상.

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듯합니다. 지식의 극대화로 더 이상 부족한 게 없는 세상. 인류가 처음 부닥치는 현실입니다. 인류의 투쟁은 지금까지 생산력의 극대화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늘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였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고요. 그리고 마침내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앞섭니다.

물건을 만들어도 팔 곳이 없는 세상이 된 거죠. 또 물건 만들 기업이 투자할 데가 없으니 돈을 안 빌리게 되고 그래서 마이너스 금리라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거구요. 지식도 마찬가지 신세가 됐습니다. ‘암기된 과거’로서의 ‘앵무새 지식’은 차고 넘쳐서 취미가 아니라면 그걸 구매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지요. 계속 암기하는 것은 팔리지 않을 물건을 계속 만드는 것과 같겠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특별히 고민하지 않았던 보통사람들도 ‘암기된 과거’를 주입하는 지금의 지식 교육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이론적으로 적립되지는 않았지만 지식과 지식인의 초라해진 처지를 몸으로 실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식만은 지식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게 참 이율배반적입니다.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면서도 왜 그 길만을 고집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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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사람살이의 고민은 아무래도 이 지점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왜 팔리지 않을 상품을 여전히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왜 쓸 곳이 별로 없는 지식을 여전히 암기하려고 하는 것일까. 암기 행위를 멈추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서로 어떤 토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모든 걸 시작하기 위해 먼저 ‘지식에 대한 숭배’부터 버리면 어떨까요.

그리고 불편함과 불합리를 잘 따지고 토론하는 일부터 배우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면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만들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쓰임새를 찾는 일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