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 바퀴라도 갈아끼워야 산다

[리셋 IT 코리아 3-2 ]韓 제조업 살길은 혁신

홈&모바일입력 :2017/03/22 15:22    수정: 2017/03/22 16:20

박영민, 이은정, 정현정, 조재환 기자

그야말로 ‘혁신 권하는 사회’다. 다 바꾸라고 하고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도 한다. 최근 혁신의 모범 사례로 언급되는 기업은 주로 구글, 아마존, 테슬라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다. 인공지능(AI), 스마트홈, 빅데이터, 스마트헬스, 자율주행차 등 4차산업혁명의 핵심이 되는 신사업 분야를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주춤거리는 사이 도태된 기업들의 실패 사례도 반면 교사로 회자된다.

한 때 서버 시장 1위로 실리콘밸리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썬마이크로시스템즈는 혁신에 거듭 실패하면서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과 같은 후발 혁신 기업에 밀려 2009년 오라클에 인수됐다. 이후 이 먼로 파크에 위치한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캠퍼스를 인수한 페이스북은 출입구에 ‘SUN’ 간판을 그대로 두고 그 뒷편에 페이스북 ‘좋아요’ 로고를 올려놓았다.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페이스북 직원수는 지난 10년 간 150명에서 1만5천여명으로 100배 늘어났다. 평균 연봉이 2억원대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경영 선언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 산업계에 회자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직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놀이터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기존 과장님, 차장님 같은 직급체계도 깨뜨린다.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고 혁신해야한다는 지적에 "혁신 강박증에 걸릴 것 같다"는 토로가 나올 정도다. 이제 남은 질문은 "대체 혁신은 과연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 것일까"하는 문제다.

우리나라는 지난 40여년 간 제조업을 기반으로 고도 성장한 국가다. 하지만 산업의 틀이 바뀌는 4차산업혁명 시대 혁신 없이는 현재의 성공을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

■"달리는 기차의 바퀴를 갈아 끼워라"

혁신이 실종된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공통적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혁신가의 딜레마’다. 또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나라 기업들이 혁신에 인색한 이유에 대해 3차산업혁명 분야 경쟁이 너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라는데에도 대부분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미래 준비에 내부 역량을 강제적으로라도 투입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경주 미래경영전략연구원 원장은 “비유를 하자면 달리는 기차를 멈추고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이 아니라 달리면서 동시에 갈아 끼워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가전제품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스마트홈과 사물인터넷 등 우리 기업들이 보유한 강점 위주로 강하게 치고 나가되 소프트웨어처럼 약한 부분은 전력적 제휴를 한다거나 인수하는 식으로 빠르게 타이밍을 선점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에서 27년 간 근무하며 통신과 휴대폰 분야 전략 기획 업무를 맡아온 그는 “대기업의 리더라면 실적 관리 보다는 미래 준비에 더 많은 역량을 할애해야하는데 삼성전자를 비롯해 국내 대기업 경영진들의 목표관리(MBO)는 주로 현재 실적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미래 준비라는 부분이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인수합병(M&A) 실적이나 우수한 인력 확보, 핵심 기술에 대한 투자 등 지표로 계량화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가장 기본적인 혁신 방법론으로 언급하는 것이 인수합병과 인력 확보다. 파괴적 혁신의 발목을 잡는 기존 체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의지로 새로운 혁신의 씨앗을 외부에서 수혈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기업 인수에 인색했던 국내 기업들도 삼성페이 성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성전자의 루프페이 인수 사례 등을 계기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 혁신 기업으로 꼽히는 구글 조차도 혁신을 가속화하기 위해 외부의 혁신 씨앗을 공격적으로 인수하고 있다. 전 세계에 알파고 쇼크를 던진 딥마인드가 대표적이다. 중국은 아예 국가 차원에서 지난 2008년부터 해외 고급인재 2천명 유치를 목표로 하는 '천인(千人)계획'을 혁신 프로그램의 하나로 추진하고 있다.

판이 변하는 4차산업혁명 시대, 일상적 혁신이 아니라 한 번 크게 치고 나가는 파괴적 혁신을 위해서는 리더십의 변화도 수반돼야한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기업의 최정점에 있는 최고 의사 결정 책임자의 변화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회사가 혁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경주 원장은 “중국의 마윈과 레이쥔, 미국의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등은 모두 창업 1세대이고 인터넷 세대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면서 “반면에 우리 기업들은 창업 2~3세대는 자신의 모든 걸 거는 대신 물려받은 것을 잘 지켜나가는데만 몰두하기 때문에 공격적인 경영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소·중견 기업들을 보면 창업 1세대라도 매출 1조 정도가 넘어가면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독일의 대표적인 제조업 기업인 지멘스는 짐 하게만 스나베 전 SAP 최고경영자를 최근 이사회 공동의장으로 임명했다. 하게만 의장은 SAP에서 빅데이터 솔루션 사업을 진두지휘 한 인물이다. 더 눈여겨 볼 만한 점은 세계 1위 해운사인 머스크도 비슷한 시기 스나베 전 CEO를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차상균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장(전기정보공학부 교수)은 “지멘스는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 1차산업혁명이 독일에서 막 시작되던 때에 창업해 1, 2차 산업혁명과 세계대전을 모두 거치고 살아남은 업체”라면서 “생존 본능이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영속 가능한 지배구조가 만들어진 기업이 없다"면서 "지금처럼 무작정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손자로 이어져 내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는다"

'제4차 산업혁명의 대부'이자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창립자인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 포럼에 참석해 “과거에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었지만, 이제는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가 온다”고 말했다. 덩치가 큰 대기업은 기민한 대응에 한계가 있는 만큼 작은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강소기업을 중심으로 재편해 빠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물고기들의 조합이 될 수 있도록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1차, 2차, 3차식 하청구조로 이뤄진 우리 산업 생태계에서는 어려운 얘기다. 3차산업혁명 시대에는 완제품부터 부품소재까지 이어지는 수직적 기업구조가 힘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같은 구조에서는 전방 산업이 어려움에 빠질 경우 후방 산업이 전멸될 위험도 존재한다. 핀란드 국가 경제의 20%를 차지했던 노키아가 무너진 이후에도 생태계 내에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다시 자생적으로 일어나며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이 무너진다면 대기업 납품에 목숨을 거는 중소기업들이 차례로 도산하며 생태계가 공멸할 가능성이 높다.

김은 한국ICT융합네트워크 상근부회장은 "인더스트리4.0에서 주장하는 네트워크 효과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해서 추진할 때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중소기업과 상호 네트워크를 기대할 수 없다면서 "지금까지 한국 대기업의 주류 시장이었던 대량 생산 시장은 점차 중국에 잠식되어 가는 추세로 네트워크 효과가 없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미래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하청구조 하에서 만들어진 '납품단가 후려치기'나 '아이디어 가로채기' 같은 관행은 건전한 생태계 조성을 방해하고 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삼성과 소송하면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빠르게 변하는 IT 기술의 경우 소송에서 이겨도 배상금액이 쥐꼬리이고 이미 그 기술은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이라 소송에서 이기고도 망한다는 의미"라면서 "이런 경우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천문학적인 배상을 해야하는 미국에서는 기술이 필요하면 적정한 가격으로 사는 문화가 정착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주 원장은 "하청 구조에서 수평적 기업구조로 혁신해야만 청년 일자리가 나오고 선순환 구조가 마련될 것 같다"면서 "단번에 되지는 않겠지만 중소중견 기업들과 대기업이 힘의 크기가 아니라 실력으로 대등한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중소·중견 기업에서 영웅이 나온다면 우수한 인력이 대기업이나 공무원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중소·중견 기업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 "역할분담 과정에서 대기업이 힘의 논리로 중소·중견기업을 억압하는 부분은 공정위가 기업 경찰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들도 대기업 납품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전략에서 탈피해서 자생력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정부 정책도 중소기업 달래기 식에 복지형 정책이 아니라 서구 국가들처럼 ‘이노베이션’에 중점을 둔 지원 정책을 시행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들은 사내 벤처를 적극 육성해 큰 조직에서 실행하지 못하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험하는 식으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기업 문화도 바뀌어야한다. 기존 패스트 팔로워 입장에 있을 때는 리더를 중심으로 한 연공서열 문화와 일사분란한 수직적 인사체계가 효율적이었지만 직원들의 역량과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 문화가 더 중요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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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①4차산업혁명…韓 제조업, 노키아 될라

②달리는 기차 바퀴라도 갈아끼워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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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4차산업혁명 대비 '지뢰밭 규제' 해체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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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이은정, 정현정, 조재환 기자pym@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