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 잘라낸 개발자', 산재 인정은 됐다는데…

판결 확정됐지만 보상절차 혼자서 밟아야

컴퓨팅입력 :2016/07/26 14:37

만성적 과로로 인한 소프트웨어(SW) 개발자의 발병이 산업재해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본 법원 판결이 마침내 확정됐다. '폐 잘라낸 개발자'로 불리는 SW개발자 양도수 씨와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승인 여부를 둘러싼 행정 소송에서 패소한 공단이 상고를 포기한 때문이다.

하지만 양 씨가 공단으로부터 산재보상을 받아내기 위해선 여전히 자력구제에 가까운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양 씨는 과거 농협정보시스템 재직 당시 만성적 과로로 결핵성 폐질환에 걸려 폐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지난 2013년 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산재 승인을 거부(요양 불승인 처분)한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 지난 1월 20일 1심과 6월 2일 항소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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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은 서울고등법원 재판부의 항소 기각 판결을 6월 10일 송달받았고 상고 시한이었던 6월 24일까지 상고를 하지 않았다. 6월 25일자로 공단의 항소심 패소가 확정됨에 따라, 양 씨의 청구대로 그의 '산재(요양)불승인' 처분이 취소됐다. 만성적 과로로 건강이 악화된 양 씨의 사례가 산재로 인정됐다는 얘기다.

양 씨와의 행정소송을 수행한 근로복지공단 송무1부 담당자는 26일 "해당 소송은 공단에서 상고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종료됐고, 소송 결과는 당초 산재(요양)불승인 처분을 내렸던 지사로 통보됐다"고 밝혔다.

■ 공단은 행정소송 패소후 나몰라라

양 씨가 법정다툼으로 산재 인정을 받긴 했지만, 이게 산재보상 수혜자가 됐다는 얘긴 아니다. 그에게 산재보상을 받기 위한 길이 트인 것뿐이다. 그는 이제 직접 공단 측에 보상을 신청하고 이를 위해 심사 등의 절차도 밟아야 하는 상황이다.

당초 요양불승인 처분을 내렸던 공단 서울남부지사 측은 양 씨처럼 행정소송 판결로 산재보상 가능성을 얻은 당사자를 지원하는 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단의 패소 판결을 받고 전산망에 그 내용을 반영하긴 했지만, 정작 양 씨에겐 이를 알리지 않았던 것.

지난 25일 양 씨는 "(판결 확정 후) 공단에서 산재 등록 여부에 관해 안내할 것이라 여겼다"며 "1개월(6월24일~7월25일)간 아무런 연락이 없어, 직접 이리저리 전화를 걸어 보니 담당자가 이미 시스템에 등록이 돼 있다더라"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 로고

26일 서울남부지사 측에 요양지급이나 재활보상 절차를 문의한 결과, 실제로 공단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 승소해 처분이 바뀐 당사자에게 산재 대상자 등록 사실을 안내하고 사후 보상 신청을 접수하도록 유도하는 절차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산재 대상자 등록 사실을 안내하고 보상 신청을 유도하는 절차가 없기는, 남부지사에 소송 결과를 통보하는 공단 측도 마찬가지다. 소송을 직접 수행하는 공단의 송무부 직원이 패소 후 상대방에게 선의를 발휘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법률사무소 새날의 권동희 공인노무사에 따르면 공단의 송무부 소속 소송수행자들에겐 누적된 패소 확정판결이 인사고과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참조링크: 근로복지공단 소송남용 규제해야]

■남부지사 "직접 접수하고 심사 받아야"

양 씨처럼 요양불승인 처분을 취소했다 하더라도 산재 수혜를 받으려면 별도 서류 접수와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서류 접수 후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라는 심의기구가 의학적 소견을 곁들여 '업무상 질병인지'를 또 판단한다.

이미 행정소송에서 전문가의 의학적 소견을 근거로 승소한 양 씨의 사례를 전담 기관에서 신속하게 처리하는 절차가 없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다른 산재 접수 건과 동일하게 질병판정위원회 심사를 또 받아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관련 부서 담당자는 "양 씨 사례처럼 요양불승인 취소 판결을 받은 경우 법원 판결문을 받지 않느냐"며 "그 후 신청 서류를 갖춰 (요양 내지 보상을) 접수하면 7일 이내에 처리 된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위원회가 (행정소송까지 해서 승인된 산재 사례를) 전혀 다르게 심사하진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산재 등록 여부뿐아니라 이런 정보를 신청 당사자에게 안내하고 보조하는 업무는 담당자들에게 필수 절차가 아니다. 장해등급 판정, 치료비나 휴업수당 등 서류 접수 전에 파악해야 하는 여러 혜택과 조건도 산재 인정된 당사자가 스스로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근로복지공단,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이라는데…

양 씨의 산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3년간 행정소송을 치러 2번을 패소한 공단이나, 판결 후 당사자가 알아서 산재 등록 여부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서울남부지사의 수동적인 대응이, 과연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자처하며 정부의 산업재해 보상을 책임지는 고용노동부산하 준정부기관의 위상에 걸맞는지 의문이다.

양 씨의 사례를 통해 드러난 공단의 행정서비스 수준은 이재갑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의 메시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이사장은 공식사이트 인삿말을 통해 "최고 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근로자 복지기관으로서 고객 감동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일하는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모든 업무를 고객 중심으로 생각하고,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존중하는 고객감동경영과 업무 프로세스 개선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가장 믿고 찾을 수 있는 사회보장서비스기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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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행정 처분을 내린 기관을 법으로 싸워 이겨도 당사자가 그걸 바로잡기 위한 수고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건 문제다. 향후 공단의 업무 프로세스가 이 이사장이 표방하는 것처럼 고객 중심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