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취업보다 창업이다

[이균성 칼럼]AI시대 일의 의미

방송/통신입력 :2016/06/24 14:41    수정: 2016/06/27 07:03

일(노동)은 자고로 고된 거다. 정신과 육체를 힘써 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란 단어의 어감에는 힘들다는 뜻이 배어 있다. 힘을 쓰는 게 일이니 힘이 안 들 리 없다. 그렇게 고된 일을 긍정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에 자아성취라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나 그건 사실 일의 고됨을 망각키 위한 심리적 마약(痲藥)일지도 모른다. 약효가 길지 않다. 그걸로 근본을 고치는 건 불가하다.

일이 험한 건 결국 밥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밥을 얻기 위해 원치 않은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우린 그걸 보통 노예라고 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노예제도가 없어지긴 하였지만 여전히 절대다수의 사람은 누군가에게 고용돼 품을 파는 삶을 산다. 현대에서는 그 관계를 근로계약이라는 말로 순화하지만 피고용자는 자신의 삶이 노예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노예든 피고용자든 그 불편함을 참는 건 그 관계와 고된 일로 인해 어쨌든 먹고 살 밥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그 관계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장기적이기 때문에 크게 바꿀 생각 없이 수용되는 것이다. 앞으로 문제는 그 관계마저 안정적이지 않을뿐더러 장기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쌍방 간의 계약이긴 하지만 더 주도권을 쥔 고용주가 그걸 바라지 않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예견한 세계경제포럼이 남녀간 고용 격차가 더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진=WEF)

고용주(=영리법인으로서의 기업)는 법에 의해 인격(人格)을 부여받지만 그 인격은 피고용인(=자연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고용주 인격의 제1 덕목이 이윤 극대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일반적인 이윤 극대화는 ‘현재 피고용인의 일’을 ‘과거 피고용인의 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걸 좋은 말로 자동화라 한다. 자동화는 사람 대신 기술을 쓴다는 의미인데, 기술은 과거 피고용인의 일로 생긴 산물이다.

고용주의 제1 덕목은 이윤 극대화이고, 그 최선의 방법은 ‘과거의 일’로 ‘현재의 일’을 소외시키는 것인데, 사회가 어느 정도 견제는 하겠지만, 현재로선 그걸 근본적으로 막을 길이 없다. 그게 우리 모두 합의한 자본주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과거의 일’의 가치가 ‘현재의 일’의 가치보다 커지게 되는데 지금은 그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히 역전되는 초기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

이 현상이 급진적으로 진행되는 걸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들 부르는데, 우리에겐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지구적으로 볼 때 ‘과거의 일’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현재의 일’은 갈수록 불필요해지고 일이 없으니 밥 구할 길도 막막한 상황. 생산이 수요를 초과했으니 밥걱정 할 필요가 없어야 마땅한데 다수는 되레 밥걱정이 더 커지는 현실.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선진국에서 부닥친 현실이다. 점차 폭을 넓혀가는 ‘마이너스 금리’라는 괴물은 그런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생산은 넘쳐나는데 일이 없으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되레 줄어든다. 고용주로서는 상품을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니 이제 ‘과거의 일’마저 소외시켜야 할 상황이다. 투자할 돈은 금고에 잔뜩 쌓여 있는데 쓸 곳이 없다. 그래서 돈 값이 개 값이다.

‘과거 피고용인의 일’과 ‘현재 피고용인의 일’을 적절히 조합해 덩치를 키운 고용주마저 갈 길을 잃을 상황이다. 이윤 극대화가 그들이 가야할 길인데 전혀 새로운 방식의 문제에 봉착하고 만 것이다. 피고용인의 밥 살 돈을 올려주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만 그건 한 고용주의 변심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한 고용주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고용주를 다 변심시킬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고달픈 청년이여, 또 늘 실직의 위기에 빠진 애달픈 ‘노예’여. 그러니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두 가지를 고민해나가자. 상상(想像)과 창업(創業). ‘과거의 일’에 현재의 우리가 패배하지 않는 길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창업은 또다시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또 하나의 고용주(혹은 오너)가 되자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업(業)을 창(創)한다는 건 이제 자신의 개성과 강점을 살려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뜻으로 바뀌어야 한다. 머잖아 쫓겨나거나 소멸될 당장의 밥그릇 크기를 따지고 그것에 애면글면하면서 미래를 저당 잡히기보다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건 고용주든 피고용인이든 마찬가지다. 창업은 그래서 이제 '본질적인 즐거움을 찾아가는 고유의 과정’과 관계가 깊다.

관련기사

창업은 따라서 전체성과 획일성에 대한 거부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내면을 면밀히 들여다본 뒤 과거의 틀로 구성된 교육(예를 들어 공부 잘하면 모범생이고 예체능 학생들은 꼴통이라는 인식 따위)과 가치관으로부터 탈출하는 게 첫걸음이다. 그렇게 내면을 깊고도 넓게 들여다 본 뒤 스스로의 즐거움과 강점을 믿고 과거에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걸 구현해나가는 과정이 곧 창업인 것이다.

일의 의미에 대해 개인은 물론 교육당국을 비롯한 정부와 기업의 인식변화가 시급한 때다. 그래야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