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가이드라인 ‘산 너머 산’

사생활 보호 vs 표현의 자유

방송/통신입력 :2016/02/29 16:10    수정: 2016/04/12 18:00

정부가 ‘잊혀질 권리’ 법제화를 추진하려다 ‘사생활 보호’와 '표현의 자유' 등 가치 충돌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가이드라인’ 제정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강제성이 덜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뒤 개인의 잊혀질 권리 보장 범위를 단계적으로 키워나가겠다는 뜻인데, 가이드라인이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된다.

정부는 올 상반기 중 잊혀질 권리와 관련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는 계획이지만, 사회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해 큰 진통이 예상된다. 나아가 과연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 또는 가이드라인이 국내에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논의도 계속 이뤄질 전망이다.

2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올 상반기까지 마련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 논의되는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방통위의 잊혀질 권리 가이드라인은 개인이 올린 글에 한정해 사업자에 차단 또는 삭제를 요구하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단, 정치인이나 기업 임원, 연예인 등과 같은 공인은 배제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신문기사처럼 언론 중재법 등 이미 구제 방안이 마련돼 있고 국민들의 알권리가 필요한 영역은 잊혀질 권리 삭제(차단) 대상에서 제외될 것이 유력시 된다.

2014 온라인 개인정보보호 컨퍼런스.

■방통위 1년반 연구 여전히 '걸음마'

방통위는 지난 2014년 9월부터 관련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잊힐 권리 연구반’을 운영해 왔음에도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방통위는 2015년 업무보고서에 표현의자유-알권리와의 조화, 기술적 경제적 한계 등에 대한 분석과 전문가 의견수렴을 통해 잊혀질 권리 법제화 방안 검토 계획을 언급했다. 그 후 몇 차례의 공청회와 콘퍼런스를 개최했지만 최근에서야 내려진 결론은 “금년 상반기 중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방통위는 우선▲삭제 가능한 범위를 본인 글로만 한정할지, 타인이 올린 자신에 관한 글까지 포함시킬지를 비롯해 ▲삭제 요청할 수 있는 주체를 본인으로만 할지, 가족이나 유가족 등에게도 부여할지 정하지 않았다. 또한▲삭제 대상을 검색 포털 사업자만으로 할지, 블로그나 커뮤니티 등 작은 규모의 사이트도 포함시킬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통신 사업자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삭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할지, 아니면 삭제 여부를 판단할 별도의 기구를 마련할지도 미정이다. 대상에서 제외할 공인의 기준과 적용 범위도 획정해야 한다.

방통위 관계자는 “상반기 중 가이드라인 제정 외에 아직 확정된 내용이 하나도 없다”면서 “이제부터 토론회 등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해서 결론짓겠다”는 방침이다.

방통위가 해외 사례 분석과, 잊혀질 권리 도입에 대한 필요성을 재확인하는 데만 1년 넘는 시간을 들였다는 뜻으로, 그간의 연구가 아직 걸음마 단계라는 뜻이다.

또한 강제성 없는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로레나 야우메 팔라시 박사

■“가이드라인, 논란과 분쟁만 야기할 것”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소속 안정상 방송정보통신 수석전문위원은 잊혀질 권리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근거와 기준 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정책으로 포털사업자에게 요청하는 식이 아닌, 입법적 해결이 바람직하다는 것.

안정상 위원은 “방통위는 2014년 9월부터 전문 연구반을 꾸리고 개인정보의 삭제 요청 범위 등 법령 개정 방안을 도출하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진전된 구체적인 입법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면서 “벌써 1년6개월이 경과됐음에도 금년 상반기 중 법적 실효성도 없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실험과정을 거쳐 법제화에 대한 논의를 할 수도 있다는 입장은 방통위가 무능하거나 무관심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라고 지적했다.

또 “입법과정에서 포털 사업자의 판단에 따라 삭제 인정 여부를 심사하는 것은 사업자나 정보주체에게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보주체의 삭제 요구에 따른 분명하고 신속한 대응과 사업자의 삭제에 관한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잊혀질 권리와 관련된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단순히 가이드라인, 지침 등으로는 법적 강제력이나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에 논란과 분쟁만 야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잊혀질 권리 법제화를 위한 전문가 토론회. 전병헌 의원(왼쪽), 최문순 강원도지사.

강원도와 업무협약을 맺고 잊혀질 권리 사업화를 추진 중인 송명빈 박사는 정부가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존중에 나섰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현재까지의 결과물에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 잊혀질 권리의 개념을 ‘검색 차단’에서 ‘자기 통제권 강화’라는 측면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명빈 박사는 “방통위가 지난 1년 간 전담반을 꾸리고 연구해서 내놓은 결과물이 이미 발표된 논문 등에 나온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면서 “잊혀질 권리는 소비자 주권, 자기 통제권 강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단순 검색 링크 제외 정보로는 안 되고 전체적인 관리 플랫폼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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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 주장과 가이드라인 제정과 별개로, 잊혀질 권리를 사회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한국인터넷기업협회 후원으로 열린 정보삭제 권리에 관한 국제컨퍼런스에서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로레나 야우메 팔라시 박사는 “법으로 제정해서 윤리적인 부분을 제재할 것이 아니라 이는 사회에 맡겨야 한다”면서 “민주주의가 잘 안 지켜지는 국가일수록 나라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데 정보를 은폐하기 위해 잊혀질 권리를 악용할 수 있다. 잊혀질 권리가 사용자 권한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 사람들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고 조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