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들 "규제 말고 육성...뭉쳐야 산다"

일반입력 :2013/11/04 15:58    수정: 2013/11/05 08:05

남혜현 기자

자유로 귀신!

윤태호 작가가 굴욕적이라는 듯 스케치북으로 얼굴을 감쌌다. '만화가 스피드 퀴즈'에 출제자로 나선 윤 작가가 그린 것은 '차도남'. 5초라는 짧은 시간, 차도에 선 남자를 그리고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연제원 작가가 정답으로 외친 것은 '자유로 귀신'이었다. 객석에선 웃음이 '빵' 터졌다.

3일 부천만화박물관에선 '만화의날' 행사가 열렸다. 많은 이들이 잘 모르지만 매해 11월 3일은 '만화의 날'이다. 우수 만화를 시상하는 자린데, 올해 처음 부천만화박물관에서 행사가 열렸다. 국내 만화가들의 70%가 거주하다는 부천에서, 말 그대로 '만화가의 만화가에 의한 만화가를 위한' 축제를 개최한 셈이다.

오후 2시경, 행사장을 찾았다. 로비를 걸어다니는 사람 중 절반은 '만화가'로 보였다. 이름표를 단 만화가들을 팬심으로 바라봤다. 맙소사, 저분은 허영만 선생 아닌가. <키드갱>의 신영우, <까꿍>의 이충호라니…가문의 영광이다, SNS에 적어야지. 앗! 하일권, 윤필이다! 노다지다.

만화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웠다. 후배 작가들은 선배에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깍듯이 인사했다. 반갑게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었다. 선배들은 네 만화 잘 보고 있다, 그런데 왜 연재를 마저 안하냐라며 격려했다. 이들은 평소에 자주 봤을까, 술도 많이 마실까, 생각하며 쭈뼛쭈뼛 다가갔다. 저, 모두 이렇게 자주 만나시나요?

■만화가 선후배 자주 만나는 자리 만들어야

만화의 날이 하루만은 아니다

<까꿍> <마이러브>로 90년대 명랑 만화를 이끌었던 이충호 작가는 만화의날 행사가 동료 선후배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웹툰을 하는 친구들이 제 만화를 보고 자랐고, 나는 선배들의 만화를 보고 자랐다라며 그런데 지금은 세대간의 분절이 심하다, (이런 모임이) 만화가들을 조금 더 묶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국만화가협회 협의 부위원장을 맡은 박영준 작가는 만화가들이 모일 일이 전혀 없다, 웹툰 작가는 웹툰 작가끼리, 순정은 순정, 명랑은 명랑 만화 작가 끼리만 모인다라며 90년대 초반엔 화실이 달라도 잘 모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게 없다, 모임이 많이 활성화 되야 한다라고 말했다.

협단체 등을 통해 만화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만화가들의 복지와 권리 찾기 등 여러 측면에서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야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날 컨퍼런스에 발제자로 참여한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작가들이 협회에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라며 많은 선배들과 지혜를 모아서 문제가 있거나 할 때, 좀 더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라고 권유했다.

이충호 작가는 지원도 지원이지만, 만화가들들이 스스로 노력을 해야 한다라며 우리들이 안하면서 어디서 지원을 받을 수 있겠나. 스스로들이 좀 노력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희재 선생 게임 규제는 말도 안되는 소리

만화가 창작물로 인정 받은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날 행사장에선 '예술가 복지'를 설명하는 부스가 차려졌다. 지난해까진 없던 풍경이다. 우리 정부가 만화를 예술로 인정한 것은 겨우 올해의 이야기다. 그만큼 만화가들은 오랜 기간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조관제 한국만화가협회장은 만화는 아날로그 정서에서 한동안 소외돼왔지만 IT 기술과 만나면서 웹툰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확장됐다라며 모든 문화 콘텐츠의 원천인 만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아 산업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라고말했다.

만화를 산업으로 활성화 시키려면 더욱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만화가협회 김정태 이사는 장기적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지원 사업이 필요하다라며 특정인들에게 집중되는 지원 사업 말고, 소외된 작가들에게도 기회가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스타 작가를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고 행사장에 온 영원한 청춘 장태산 작가는 열명한테 1천만원 씩 주느니, 한명한테 1억원을 주고 좋은 작품, 결과물을 원해야 한다라며 집중적인 작가 육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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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나 게임 같은 주요 콘텐츠를 정부가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가 컸다. 원로작가인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이희재 선생은 만화, 게임을 규제하자는 것은 콘텐츠 산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라고 강조했다.

최근 다녀온 알제리에서 한국 문화를 익숙하게 받아들인 것이 인상 깊었다던 이희재 선생은 이를 콘텐츠의 힘이라며 국산 게임이 전세계서 영향력을 갖듯, 우리 만화도 그렇게 뻗어가도록 지원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