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노조, '폐 잘라낸 개발자' 소송 지원

일반입력 :2013/03/24 09:42    수정: 2013/03/24 17:39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이하 'IT노조')이 농협정보시스템에서 2년간 수천시간의 무임금 연장근로에 시달리다 폐를 잘라낸 IT노동자 양 모씨의 법정싸움을 후원하고 있다. 1심 결과 패소한 농협정보시스템의 항소로 2차 공방이 예고됐다. 일부 승소한 양 씨도 '과로에 의한 산업재해'를 입증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싸울 뜻을 밝혔다.

■'폐 잘라낸 개발자' 일부 승소

양 씨는 지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농협정보시스템에서 일하다 폐결핵을 진단받았다. 면역력이 크게 떨어지고 항생제가 듣지 않아 지난 2009년 폐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2년동안 4525시간을 초과근로한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당시 농협정보시스템은 치료를 위한 병가후 복귀한 양 씨에게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했다. 건강 악화에 따른 사과나 보상은 없었다. 이후 양 씨가 회사쪽에 산재신청에 필요한 야근기록을 제시했지만 그마저 인정해주지 않았다.

양 씨는 지난 2010년초 농협정보시스템을 상대로 '연장, 심야, 휴일근로수당 청구소송'을 시작했다. '과로에 의한 산재'를 인정받을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차원이었다. 지난달 21일 내려진 1심 결과는 양 씨의 일부 승소였다. 34개월가량 재판 끝에 얻은 결과지만 주장한 초과근로시간의 30%만 인정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이종민 판사는 양 씨가 2년간 1천427시간을 초과근로했다고 인정해 수당 1천169만4천405원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회사측에 내렸다.

■과로로 인한 산재 인정받기 위한 과정

재판부는 양 씨가 일을 처음 시작한 2006년 11월엔 평일 오후10시까지, 12월엔 오후11시까지 매일, 2007년에도 10월~12월엔 평일 오후 11시까지, 2008년 7~8월 사이엔 매일 자정까지 야근한 것으로 인정했다.

당시 양 씨는 일반적인 야근 수준으로 저녁식사 후 2시간 일한 정도를 인정한 셈이라며 2년 넘게 매일같이 새벽 퇴근, 주말과 휴일 근무를 반복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결과라고 말했다.

그가 지난 2010년 3월초 언론사 인터뷰로 밝힌 내용에 따르면 2006년 7월 입사후 6개월간 대개 자정을 넘겨 귀가했고 더러 밤샘도 했다. 그 직후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돼서도 매일 '자정후 귀가'를 계속했다. 시스템 오류가 발견된 2007년말~2008년 6월간은 매일 새벽2~3시까지 일했다.

이는 양 씨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기각된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공단에 행정소송까지 진행해 기각됐던 산재보상을 받기 위한 과정으로 농협정보시스템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1심 판결 내용을 보고 나머지 3천98시간도 초과근로했음을 인정받겠다며 항소 의지를 밝힌 이유다.

■관할감독-수사기관 도움 없었다

22일 양 씨는 5년전 회사의 부당한 처우를 노동부 강남지청(정부 감독기관)에 신고하거나 불법적 행태를 경찰과 검찰에 고발해 봤는데 시정명령은 커녕 시간만 끌다 증거부족, 무혐의 결론만 냈다며 이후 소송 등으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몇 분이 도움을 주다 지쳐 그만뒀고, 관심도 사그러졌는데 IT노조에선 꾸준히 도왔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지난 근무기간을 후회해 바로잡기위해 시작한 소송이었는데, 판결 내용은 이 시대의 기준과 가치관이 야근과 과로에 대해 너무 당연하고 무책임하게 여긴 결과 아닌가 싶다며 과연 (법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노동자가 자기 근무시간을 어느 수준까지 입증해야 하는지 법원의 판단 결과를 기록에 남겨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달초 이 소식을 접한 대전개발자커뮤니티, OKJSP 등에서 활동하던 개발자들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자발적인 항소 후원 모금을 추진했다. 사건을 공론화하고 소송절차를 도왔던 IT노조는 아예 공식 사이트에 'IT야근 및 산재소송 특별게시판'을 열고 모금계좌를 개설했다.

IT노조의 소송 후원 모금 게시판에는 지난 11일부터 1일 모금액과 참여인원 현황이 공개되고 있다. 약 400만원가량의 누적 모금액가운데 항소심과 1심 변호사 선임비용 명목으로 200만원이 양 씨에게 지원됐다. 모금은 소송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아직 경제적 지원보다는 양 씨의 싸움을 독려하는 성격이 크다.

■'개인 문제' 아니다

나경훈 IT노조 사무국장은 양 씨의 사건이 처음엔 억울한 마음에 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모든 IT노동자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며 어려운 싸움을 이끌어온 양 씨에게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1심 판결 내용에선 농협정보시스템 쪽 입장이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양 씨가 일부나마 승소를 거둘 수 있었다. 회사쪽이 양 씨의 야근은 자발적이었고, 수당은 회사가 할당한 시간대로 정액 지급을 합의했으며, 수당청구 시효도 끝났다는 주장을 기각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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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젠 양 씨 입장에선 혼자서 항소 절차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이전보다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농협정보시스템은 양 씨보다도 먼저 항소에 나섰고, 1심때와 달리 대형 법무법인을 선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농협정보시스템이 한차례 궁지에 몰린 만큼 재판 결과를 뒤집기 위해 과거보다 더 공세적인 대응을 펼치는 것으로 비친다. 회사는 양 씨와 같은 조건으로 일했던 당시 직원 수백명이 1심 판결을 근거로 일제히 배상을 청구하면 각각 1천만원씩만 쳐도 수십억원을 물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