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 고뇌의 2010년 '유닉스 출구전략'

일반입력 :2012/05/23 15:32    수정: 2012/05/23 16:13

CPU 공급사 인텔의 변심, 생태계에서 이탈하는 주요 소프트웨어업체. HP도 유닉스 시대의 종국을 직감한 듯 보인다. 유닉스 사업의 위기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2010년 HP의 고뇌가 공개됐다.

오라클이 최근 공개한 HP 내부문건 12건 중 하나는 마틴 핑크 HP 수석부사장의 이름으로 2010년 작성된 프리젠테이션 자료였다. ‘HP-UX 사업을 연장하는 비즈니스 크리티컬 시스템’이란 제목의 이 자료는 HP의 고부가가치 사업 유지를 위한 고뇌를 담았다. HP-UX는 HP에서 판매하는 유닉스 운영체제(OS)의 명칭이다.

이 문서가 작성되던 시점, HP는 아이태니엄 CPU 로드맵을 더 연장하지 않으려는 인텔의 움직임을 감지한 상태였다. 레드햇과 마이크로소프트(MS)는 아이태니엄 CPU에 대한 SW개발을 중단했다. 인텔, MS, 레드햇 등 과거 HP 유닉스 생태계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마틴 핑크 부사장이 붙인 프로젝트명은 ‘레드우드’다. 레드우드는 미국 캘리포니아가 원산지인 적갈색 침엽수로 성장이 가장 빠른 생명체로 통하며, 매년 1.8m씩 자란다. 레드우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통하는데, 최대높이 100m, 수명 300년 이상에 이르는 거목이 캘리포니아 숲에서 자라고 있다.

■HP-UX 살리는 '4가지 방법' 고민

핑크 부사장은 HP-UX를 살리기 위한 선택지로 4가지를 제시했다. 시나리오1은 인텔에서 2014년 내놓을 마지막 아이태니엄 CPU 킷슨과 함께 유닉스 서버 사업에서 철수하는 것이다.

시나리오2는 HP-UX를 x86칩에 포팅하고, 슈퍼돔이라 이름붙인 x86 블레이드 서버시스템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는 벨류비즈니스인 유닉스 시장을 x86처럼 규모의 경제로 재정의하는 작업을 수반하게 된다.

시나리오3은 오라클과 연합해 IBM에 대항하는 전략이다. OEM 전략으로 이름붙인 이 전략은 구체적으로 HP가 오라클에게 솔라리스 OS 판매권을 얻어 사업을 강력하게 밀어붙인다는 내용을 담는다.

시나리오4는 아이태니엄 로드맵 지속을 위해 인텔에 투자하는 시나리오다. 현재 유닉스 시장의 위치를 연장하는 전략이다.

마틴 핑크 부사장은 이 가운데 시나리오1과 2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닉스 환경에서 운영되는 미션 크리티컬 애플리케이션을 x86 플랫폼으로 이동시키는 흐름에 한발 더 앞서 가자는 것이다. HP-UX란 OS를 유지하고 하드웨어만 바꾼다면, 고객의 x86 플랫폼 채택에 기름을 부을 수 있고, 유닉스 시장 자체를 축소시켜버릴 수 있다는 전략이다.

같은 애플리케이션이 훨씬 저렴한 하드웨어에서 똑같은 성능을 발휘하게 되면, IBM 유닉스보다 가격경쟁력에서 앞설 수 있다. 설사 고객이 IBM 파워시스템을 택해도 가격경쟁을 유도해 IBM에 마진축소란 독배를 마시게 할 수 있다는 게 HP의 계산이다.

이 전략이 성공하게 될 경우 HP는 두가지 이익을 얻게 된다. 일단 인텔, SAP, MS 등의 유닉스 파트너들로 구성되는 기존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다. 또, IBM이 파워CPU 개발을 유지하는 한 새로 만들어지는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유닉스 시장에 발묶인 IBM이 뒤늦게 사업모델 변경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막대한 투자부담을 버티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는 시나리오다.

HP는 문서에서 유닉스 시장이 메인프레임과 같은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했다. 시장이 확대되지 못하고, 점차 축소될 것이란 전망이다.

시나리오 1과 2를 선택하면 유닉스 사업 자체는 축소 수순을 밟게 된다. 여기에 유닉스 서버고객에 대한 테크놀로지 서비스(TS) 사업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x86 플랫폼의 유지보수 서비스 단가가 유닉스 플랫폼의 경우보다 낮기 때문이다.

HP는 그러나 x86 슈퍼돔의 출시 후 3년동안 TS 매출이 줄어들다가 연간 약 18억달러 선으로 고정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를 위해 하이엔드 x86제품인 프로라이언트 DL980에 투자할 것과, 유닉스와 x86을 통합하는 플랫폼을 개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2012년 현 시점에서 HP의 레드우드 프로젝트는 일정부분 구체화되는 모습이다. 작년 11월 HP는 오딧세이 프로젝트를 통해 동일 인클로저에서 슈퍼돔, 인티그리티, 프로라이언트 등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젝트는 HP-UX와 MS 윈도·리눅스 등의 운영체제(OS)를 통합 운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제온과 슈퍼돔2를 합친 통합 솔루션은 코드명 드래곤호크(DragonHawk)로 불리며, x86 블레이드서버 인클로저인 C시리즈에 아이태니엄 유닉스 블레이드를 장착하는 솔루션은 '히드라링스(HydraLynx)'로 명명됐다.

하이엔드 x86에 대한 부분도 조금씩 표면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HP는 제온 E7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8소켓 제품으로 프로라이언트 DL980을 BCS사업부에서 판매도록 했다. 여기에 DL980 제품을 위한 서비스 포트폴리오를 슈퍼돔2급으로 다양하게 마련해놨다.

최근 서비스부문 인력 중심으로 구조조정하겠다는 HP의 결정 역시 레드우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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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핑크 부사장은 이 전략의 위험 요소도 지적했다. 일단 유닉스 시장이 HP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HP가 전략을 구체화하고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망이다. 때문에 2010년 현재부터 전략을 구체화해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DB)도 변수로 지적됐다. HP-UX에 대한 오라클DB 개발 중단을 우려한 것이다. 이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작년 3월 오라클은 인텔의 차세대 아이태니엄 CPU에 SW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MS의 파트너십 정책을 HP가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도 위험요소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