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O 프리존 만들자

[박승정 칼럼] ICO 허용과 봉쇄 사이

데스크 칼럼입력 :2018/04/23 16:18    수정: 2018/06/25 22:52

19세기였던가. 한 때 공리주의가 지구상을 휩쓸 무렵,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모든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곤 했다. 당시의 공리주의적 담론이란 것은 예컨대 ‘자연’을 ‘자연자원’으로 대체해 모든 것을 현재의 사용 목적에만 집중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당시 인간의 특정 입장에서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가 된다. 또 그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이 된다. 인간에게 유익한 나무는 ‘목재’가 되고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이 되는 식이다.

이 같은 극단적 공리주의는 독일식 과학적 삼림관리에도 응용되면서 프랑스, 영국, 미국, 심지어 제 3세계 전반으로 확산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에게 유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과 유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의 이분법이 가져온 결과는 ‘숲의 죽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제임스 C. 스콧(‘Seeing Like a State’의 저자)이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의 차이를 이분법적 국가 제도의 단순화에 두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기존의 지리, 역사, 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다양한 생태계를 무시한 국가 제도의 단순화로 본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ICO를 위해 해외 진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 [사진=Pixabay]

ICO 위한 대탈출 행렬 해외로, 해외로

21세기, 최근의 일이다. 암호화폐를 공개(ICO)하려는 기업이 한국을 벗어나 해외로 몰려 나가고 있다. 블록체인 관련 한 협회가 파악한 기업만 100여개에 달한다. 이른바 대탈출 행렬이다. 정부가 ICO를 사실상 막고 불법적인 투기 행위로 치부하는 동안 ‘ICT강국’을 외면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분법적인 법제도의 운용 결과다. 암호화폐는 나쁜 것이고 ICO는 투기를 조장하는 것이니 좋을 게 없다는 식이다. 부작용이 있으니 일단 막고 보자는 극단적 단순화의 결과론인 셈이다.

정부가 막으니 기회의 문(門)을 찾아 해외로 돈을 싸들고 나가는 형국이다. 예컨대 싱가포르, 홍콩, 스웨덴, 에스토니아, 지브롤타 등 ICO에 개방적인 국가가 대상이다. 이미 이런 국가에 둥지를 튼 한국 기업들도 여럿 있다. 아이콘, 글로스퍼, 보스코인, 현대BS&C, 엑스블록시스템즈 등이 스위스로 나갔고 그라운드X, 라인파이낸셜이 일본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아예 싱가포르는 국가가 나서서 ICO의 제도적 환경을 조성 중이다. 덕분에 이 도시국가는 거번테크, 메디블록, 지퍼, 칸델라체인, 인슈어리움 등 한국 기업들을 유치했다. ICO 기업들의 선호 국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면서 해외 자본 유치와 국부 창출이란 또 다른 수혜를 보는 셈이다.

이미 정부 통제를 벗어났다는 다소 성급한 얘기까지 들린다. ICO를 IPO의 진화로 인식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오히려 애매한 법조항 때문에 범법자를 양산할 수도 있다. 정부가 기회의 창을 닫으면서 일자리 창출과 신성장 동력 마련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단순하게 숫자로만 보자. 예를 들어 한 기업이 ICO를 위해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법률 자문을 포함해 홍보 마케팅, 현지 직원 파견, ICO에 따른 수입과 관련한 법인세 등을 감안하면 10억원 안팎의 비용이 발생한다. 싱가포르와 스웨덴에서 ICO를 감행한 A, B사를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것은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데 있다. 국내에서는 사실상 금지된 ICO를 위해 해외로 나가는 기업이 어림잡아 100여개에 이른다고 하면 법인세를 포함해 벌써 1000억원이 넘는다. ICO를 하고자 하는 기업이 500개에 달한다고 했을 때 기회 손실 비용은 최소 5000억원에 달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3세대 블록체인 코어 개발효과를 고려하면 시장 규모로만 1000조에 해당하는 기회 손실 비용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나온 상황이다. 글로벌 시총으로만 봐도 비트코인 150조, 이더리움 70조, 여기에 알트코인을 다 합하면 대략 1000조 규모가 넘을 전망이다. 정책 당국이 ICO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이로 인한 기회 손실 비용은 수치로 환산하지 못할 만큼 실로 막대하다.

김용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주재로 열린 가상통화 합동TF에서 ICO 전면 금지 방침이 재차 강조됐다.

ICO 불허로 기회 손실 비용 기하급수 증가

19세기 공리주의자들의 시각처럼 암호화폐나 ICO는 정말 ‘잡초’ 아니면 ‘해충’일까. 투기 광풍에 따른 부작용을 도외시 하자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금융사기, 혹은 다단계, 아니라면 일확천금을 노리는 묻지마 투기 수법을 걸러내면 그만이다. 굳이 새롭게 생태계가 갖춰지는 신산업의 싹을 자르자는 것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에 테크노크라시, 혹은 전략가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정부와 민간이 등록과 심사하는 공동 운영시스템을 만들어 운영하면 되는 것을 아예 대문부터 폐쇄해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다. 다양한 생태계를 갖춘 숲을 구상할 일이지 극단적 단순화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국내는 법무장관의 말 한 마디에 ‘암호화폐’나 ‘블록체인’이란 말은 사기라는 인식이 일반인들 사이에 팽배하다. 하지만 ‘사기’ 위험이 있으니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발상 역시 위험하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접근은 부정적일 때가 더 많은 법이다. 벤처의 역설, 발상의 전환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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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ICO를 허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부정적인 현상들을 걸러낼 법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다시 말하지만 보다 탄력적인 제도 운용이 가능하다면 파괴적 혁신이 가져올 신산업의 새 싹을 키워가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다.

좀 더 과감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 ICO 전면 허용이 어렵다면 아예 모든 법제도가 열려 있는 ‘ICO 프리존’을 만드는 방법도 한 방법이다. 기존 제주특별자치도를 활용할 수도 있다. 블록체인이 펼쳐놓을 신세계를 선도적으로 개척하자는 것이다. 유연한 제도와 조직이 이기는 법이다. 과연 제2의 인터넷 혁명기라 불리는 블록체인 경제, 분산 경제시대의 새 패러다임을 더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편집인, 과학기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