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망중립성 여론 뒤흔든 '로봇의 공격'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2천200만건 중 80%가 '가짜'

데스크 칼럼입력 :2017/11/30 15:07    수정: 2017/11/30 17:2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3개월 동안 의견 2천200만 건이 접수됐다. 단순 계산하면 전체 인구(3억2천310만명)의 6%가 참여했다. 단일 정책 변경 관련 이슈인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망중립성’ 이슈를 둘러싸고 실제 벌어진 일이다. 망중립성은 말 그대로 인터넷 서비스업체(ISP)들이 중립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망을 오가는 콘텐츠를 차단하거나, 특별 대우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국에선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5년 망중립성 원칙이 공식 도입됐다. 아짓 파이가 이끄는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2년 만에 이 원칙을 원위치 시키려 하고 있다. 망 투자 위축 등 여러 이유를 내걸었다.

(사진=씨넷)

FCC는 절차에 따라 시민의견을 받았다. 그런데 2천200만 건에 이르는 엄청난 의견이 접수됐다. 단순 수치만 놓고 보면 인터넷 이슈에 관심 있는 성인들은 거의 다 참여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곰곰 살펴보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접수된 의견 대부분이 로봇으로 자동 생성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쿼츠나 와이어드 같은 미국 언론들은 이 문제를 다소 심각하게 보고 있다.

■ 자연어 생성 기술 활용해 무차별 의견 공세

먼저 쿼츠를 살펴보자. 쿼츠는 로봇으로 작성된 130만 건 가량의 ‘망중립성 폐지 찬성’ 의견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놀랍다. 기본적으로 자연어생성(NLP) 기술이 동원됐다. 여기에 핵심 키워드들을 조합한다. 이렇게 해서 작서된 ‘망중립성 폐지 찬성’의견이 130만 건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론적으론 무한대에 가깝게 변종 의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 쿼츠에 따르면 다른 동의어로 바꿀 수 있는 단어가 20개 정도된다. 이 경우의 수로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문장이 35억개에 이른다. 사실상 유사한 문장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수 있단 얘기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 (사진=씨넷)

또 다른 디지털 전문매체 와이어드는 피스컬노트란 전문업체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이 업체는 일단 NLP 기술을 활용해 의견들을 클러스터링했다. 그런 다음엔 찬성, 반대 의견으로 나눈 뒤 몇 가지 유사점을 분석했다. 글자 형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지표를 토대로 유사한 글들을 추러냈다.

이를테면 같은 텍스트를 그대로 복제한 뒤 동일한 주제를 다룬 의견들을 구분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분석한 결과 동일한 문장과 단락구조 내에 단어만 바꿔넣은 것들을 수 십만 건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할 경우 4.5셉틸리언 개의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피지컬노트가 주장했다. 셉틸리언은 10의 24 제곱이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미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전자프론티어재단(EEF)도 로봇으로 자동생성한 의견들을 다수 접수시켰다. 친 트럼프 진영이 아주 심하긴 했지만, 망중립성 옹호 진영에서도 로봇 공세에 맞불을 놨단 얘기다.

특히 5월23일과 6월3일에 로봇 자동 생성 의견이 집중 접수됐다. 결국 사상 최대 의견 접수란 화려한 참여 민주주의란 외피 속엔 ‘로봇 의견 접수’란 추악한 얼굴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FCC에 접수된 의견 중 로봇이 생성한 것들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할까? 데이터 분석 전문업체인 그래브웰에 따르면 2천200만건 중 80% 이상이 로봇이 만든 것이었다.

그래브웰은 이 같은 분석 결과를 토대로 “진짜 사람이 작성한 17.4% 의견 절대 다수가 망중립성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고 주장했다.

■ 민주적 여론수렴 절차 유지될 수 있을까

이런 결과를 놓고 보면 “로봇이 여론을 좌지우지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논점은 크게 두 가지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FCC에게 여론을 무시할 수 있는 명분을 줬다.

둘째. 미국 정책 입안 과정에 의무화돼 있는 의견 수렴 과정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우선 첫번째 문제. FCC가 2년 만에 망중립성 원칙을 폐기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정당성이 필요하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인터넷 자유 회복’ 문건을 통해 망 투자 위축을 거론한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FCC는 또 오히려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사업자들이 입맛에 따라 여론을 조정하고 있다는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정당성과 함께 ‘여론의 지지’ 역시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중요하다. 그런데 FCC가 절차에 따라 접수한 의견 대부분은 망중립성 폐지 반대다.

5명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가운데가 아짓 파이 위원장이다. (사진=FCC)

그런데 이 부분에서 FCC는 또 다른 정당성을 갖게 됐다. “접수된 의견 대부분이 로봇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무시해버릴 핑계를 갖게 된 때문이다. 실제로 FCC는 의견 마감 직후 그런 주장을 계속 내놓고 있다.

둘째 문제는 앞으로 민주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 계속 문제가 될 소지가 많다. 특히 미국처럼 주요 정책 변경 땐 온라인 의견 접수를 꼭 하도록 돼 있는 곳에선 심각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최근 들어 NLP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동 채팅 앱이 관심을 끌고 있다. 마케팅, 저널리즘 등 여러 영역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로봇기술의 발달이 민주적 의견 수립 과정의 정당성을 훼손시키고 있다. 망중립성 원칙을 둘러싼 공방의 또 다른 부산물인 셈이다. 이런 논란이 앞으로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관심이 쏠린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