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혁신' 진수 보여준 WP의 팩트체크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정치 드라마 뺨치는 음모와 저널리즘

데스크 칼럼입력 :2017/11/29 17:12    수정: 2017/11/29 17:41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12월 12일 상원의원 보궐 선거를 앞둔 미국 정가에 정치 드라마 뺨치는 일이 벌어졌다. ‘가짜뉴스’로 유력 매체를 유인한 뒤 신뢰성에 흠집을 가하려던 시도가 딱 걸린 때문이다.

특히 이 보수단체가 은밀하게 모집한 한 여성을 섹스 스캔들 피해자로 위장한 뒤 언론사에 접근하도록 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성급한 특종 대신 ‘팩트 체크’에 무게를 실었던 이 언론사는 오히려 역공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인기 정치드라마 ‘하우스오브 카드’ 뺨치는 스토리의 주인공은 요즘 잘 나가는 워싱턴포스트다. 워싱턴포스트에 미끼를 던진 곳은 미국 대표적인 보수 단체인 프로젝트 베리타스였다.

보수 단체의 음모를 보기 좋게 파헤친 워싱턴포스트의 기사. (사진=워싱턴포스트)

미끼를 덥석 무는 대신 꼼꼼한 취재로 오히려 보수 단체의 음모를 파헤친 워싱턴포스트의 이번 쾌거는 저널리즘 혁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되새기게 만들었다.

기사를 통해 그 과정을 한번 따져보자. (☞ 워싱턴포스트 기사 바로가기)

■ 보수단체, 무어 성추문 보도했던 워싱턴포스트에 허위제보 노려

이번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앨러배마 주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선 로이 무어다. 앨러배마 주 대법원장 출신인 무어 후보는 불과 한달 전만 해도 당선이 유력했다.

하지만 선거를 한달 여 앞두고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선거판이 흔들리고 있다. 무어 후보가 젊은 검사 시절 14세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 무어 성추문을 터뜨린 건 워싱턴포스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9일(현지시간) 로이 무어가 레이 코프만이란 미성년 여성을 추행한 적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파 쪽에선 ‘가짜뉴스’라면서 워싱턴포스트를 맹비난했다.

여기까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때부터 정치 드라마 뺨치는 음모가 본격 시작됐다.

제이미 필립스란 한 여성이 또 다시 제보 거리를 들고 워싱턴포스트를 찾아왔다. 필립스는 15세 때 40대 이던 로이 무어와 성관계를 했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낙태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12월 12일 상원의원 보궐 선거를 앞두고 섹스 스캔들에 휘말린 로이 무어. (사진=로이 무어 선거공식 사이트)

이미 무어 성추문을 터뜨렸던 워싱턴포스트에겐 더 없이 좋은 기삿거리였다. 게다가 미국에선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낙태문제까지 개입돼 있다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연이은 특종을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워싱턴포스트의 취재력이 빛을 발한다. 제보자의 진술을 성급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허점을 발견했다. 우선 필립스는 10대 때 잠깐 동안 앨러배마에 살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휴대폰 번호엔 앨러배마 지역 코드가 포함돼 있었다.

또 그가 일하고 있다고 밝힌 ’NFM렌딩’ 역시 사실과 달랐다. 확인해 본 결과 제이미 필립스란 이름을 가진 종업원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워싱턴포스트가 즉시 보도를 하지 않자 필립스는 살짝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빨리 보도하지 않을 경우 특종 거리를 다른 매체에 넘겨주겠다면서 기자를 위협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끝까지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결정타는 함께 취재 활동에 참여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조사원이 찾아냈다. 웹 검색을 통해 필립스가 ‘고 펀드 미’란 웹 사이트에 올린 글을 찾아낸 것.

그 글에는 “보수 언론운동 단체의 일자리를 얻어서 주류미디어들의 거짓말과 사기 행각에 맞서 싸우기 위해 뉴욕으로 간다”고 돼 있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또 프로젝트 베리타스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비밀리에 활동할 기자’ 12명을 찾는 공고문이 올라와 있던 것도 확인했다.여러 정황을 통해 제이미 필립스가 보수 단체의 사주를 받아 허위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잠복 끝에 제이미 필립스가 프로젝트 베리타스 사무실에 들어가는 장면까지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 디지털 혁신보다 더 놀라운 '저널리즘 혁신'

이번 사건은 저널리즘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잘 아는 것처럼 워싱턴포스트는 2013년 제프 베조스가 인수한 뒤 디지털 혁신의 선두주자로 꼽혀 왔다.

각종 디지털 실험과 혁신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과정에서 제프 베조스의 아낌 없는 투자와 디지털 마인드가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변신의 밑거름이 된 건 ‘사실’과 ‘진실’에 충실했던 저널리즘 기본정신이었다. 이런 ‘긴 호흡 강한 걸음’이 있었기에 디지털 혁신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워싱턴포스트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제이미 필립스 사건 전말을 밝히는 기사엔 ‘오프더 레코드’를 전제로 나눴던 많은 대화 내용들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악의를 가진 취재원과의 오프더 레코드 약속은 지킬 이유가 없다는 설명과 함께.

그 이유를 밝히는 마틴 배런 편집국장의 설명이 상당히 감동적이다. 진실 탐구란 저널리즘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강한 믿음과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이 영화 소재이기도 한 보스턴 글로브 가톨릭 성추문 보도 당시 국장이던 마틴 배런이 현재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이다.

“우리는 선의를 갖고 있을 땐 늘 오프더 레코드 합의를 존중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 있었던 소위 오프더레코드 대화는 우리를 기만하고 당혹스럽게 만들려는 계획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함정에 빠질 경우 그 대화를 공개하려는 게 프로젝트 베리타스의 의도였던 게 분명하다.

몸에 밴 저널리스트들의 엄격한 관행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는 악의를 갖고 유인하기 위해 행해진 ‘오프더레코드’합의를 존중할 수 없다.”

사실 확인이란 저널리즘의 기본에 충실할 수 있는 그들의 취재 관행이 참 멋있다.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동어반복 같은 얘기지만, 이런 근본 위에 쌓아올린 디지털 혁신의 탑이기에, 더 탄탄하게 유지될 것 같단 생각을 해봤다.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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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기사에 나오는 마틴 배런이란 이름이 익숙한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짐작하는 대로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 편집국장으로 나오는 바로 그 마틴 배런이다. 영화에 나온대로 마틴 배런은 보스턴 글로브 편집국장 재직 당시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문과 조직적인 은폐 의혹 탐사보도를 진두 지휘했다.

2. 워싱턴포스트는 제이미 필립스 사건을 보도한 뒤 '제이미 오키프가 가짜뉴스가 뭔지 보여줬다'는 칼럼까지 게재했다. 저널리즘의 통쾌한 반격이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