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개발자와 파우스트 박사

전문가 칼럼입력 :2016/07/12 10:52    수정: 2016/07/12 11:35

임백준 baekjun.lim@gmail.com

수확이 풍성한 한국 방문이었다.

지난 6월 24일, 한빛미디어와 팟캐스트 나는 프로그래머다가 공동으로 주최한 개발자 컨퍼런스가 웃음과 열정이 넘치는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광화문과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건물의 전경이 환상적이었고, 2개의 트랙으로 진행된 강연 내용도 알차고 유익했다. 참가한 사람들 그리고 행사에 도움을 준 단체와 기업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고마움을 전한다.

행사가 열리기 하루 전에 한국에 도착한 나는 공항에서 빠져나오자 마자 호텔에 짐을 풀고 삼성SDS를 방문해서 강연을 했다. 행사 후 며칠 뒤에는 판교에 있는 카카오를 방문해서 개발자들과 피자를 나눠먹으며 간담회를 가졌다. 행사 당일 만난 사람을 포함하여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개발자와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열심히 배웠다.

나에게 모교와 같은 의미를 갖는 삼성SDS 방문한 것은 20년만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를 알아보는 동기와 후배들이 무대로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 번 칼럼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삼성이, 특히 삼성전자와 삼성SDS가 많은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LG전자와 CNS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삼성과 LG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기업' 개발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파우스트 박사를 떠올렸다.

인간 지식의 덧없음에 절망한 파우스트 박사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설득되어 거래를 한다. 그대가 세상의 모든 쾌락을 맛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겠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해서 시간을 멈추고 휴식을 원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때 그대의 영혼을 나에게 넘겨야 한다. 유명한 계약의 내용이다. 이렇게 영혼을 담보로 맡긴 파우스트는 다시 젊어져서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며 삶의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일 뿐, 그건 끝없이 이어지는 심오한 번뇌의 시작일 뿐이었다.

3년 전에 NIPA 주최로 젊은 개발자들이 뉴욕에 방문했을 때 그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 때 중소기업에 취직이 결정된 그들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의아해 하던 기억이 난다.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는 사람들, 더구나 NIPA의 지원을 받고 이미 취직이 보장되었을 정도로 선택받은 사람들의 표정이 왜 어둡지? 나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친구가 이렇게 설명했다.

"일단 월급이 두 배 정도 차이가 나거든요." 계속 이야기했다. "결혼하기로 한 여자친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는데 중소기업에 취직했다고 말하니까 크게 실망하시는 거에요." 그들은 대기업에 입사하지 못한 처지 때문에 패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패배의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대기업이다. 대기업이라는 한국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온갖 어려운 경쟁을 뚫고 입사에 성공한 인재들에게 달콤한 쾌락을 약속한다. 그들은 부모님 앞에서 당당하고, 친구 친지들로부터 부러움 담긴 시선을 받는다. 삶의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 그러나 그 달콤함은 영혼을 담보로 맡긴 것에 대한 보상이다.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며 계약서의 내용을 환기한다. 기쁨은 잠시일 뿐, 모든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심오한 번뇌의 시작일 뿐이다.

삼성SDS나 LG CNS 같은 대한민국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는 직원들 다수가 코딩을 모르는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산출물, 표준, 문서양식, 문서화, 하도급 관리, 모델중심 개발, 심지어 코드리스(codeless) 개발...

나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언급한 고민의 속살들이다. 이런 것은 소프트웨어 개발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다. 이런 껍데기에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세월을 보낸 결과, 이제는 코드를 작성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예 낯설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소프트웨어적인 역량은 책을 읽고 알고리즘 문제를 푼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청업체의 개발자들이 작성한 코드가 표준을 제대로 따르는지 확인하고, 통합테스트를 정상적으로 패스하는지 검사한다고 해서 쌓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건 개발이 아니라 그냥.. 일이다. 소프트웨어 역량은 자신의 손으로 작성한 코드를 이용해서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 오직 그 때에만 형성된다.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생기는 것이다.

밤을 새워도 자기가 새우고, 디버깅을 해도 자기가 디버깅을 하고, 코드에 찍는 점 하나에도 자기만의 고민을 담아서 키보드를 두드릴 때, 성취감이 전하는 짜릿한 쾌감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 소프트웨어 역량은 그런 성취감이 집단적으로 축적된 결과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들이 내부 직원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발을 여전히 하청업체에 의존한다면 그건 형용모순이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TV에서 뉴스를 보았다. 삼성이 효율적인 생산성을 위해서 앞으로 직원들의 직급체계를 단순화하고, 호칭을 바꾸고, 반바지를 입는 것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이므로 환영할 만하지만, 아직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에 영혼이 담보로 잡혀있는 이상, 반바지가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근무를 하라고 해도 직원들의 경직된 마음은 풀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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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의 카카오를 방문했을 때, 올해 봄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트위터 본사에 방문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사무실의 인테리어나 시설이 직원들의 신나는 정서를 창출하기 위해 정성껏 마련된 것이 비슷했고,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에 회사의 경영 철학이 반영된 진심이 드러나는 게 비슷했다. 개발자들은 밝고, 열정이 넘치고, 자존감이 그득한 표정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주눅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겨우 1, 2시간 방문한 경험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 생각은 없지만,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받는 느낌은 대개 정확하다.

삼성과 LG를 비롯한 대기업이 직원들의 소프트웨어적인 역량을 향상시키고 싶으면, 파우스트 박사가 메피스토펠레스와 맺은 계약을 파기해야 한다. 직원들이 진심으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도록,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 신경쓰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의 손으로 코딩을 경험하도록,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그리하여 짜릿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테스트라는 손쉬운 지름길이 아니라 문화를 뿌리부터 재건설하는 어렵고도 본질적인 길을 선택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몫을 인정해주고, 나라 전체의 개발자 문화를 기름지게 하는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우리나라 대기업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못지않은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갖추려면 이 정도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하는 소프트웨어 경쟁력 강화는 무망한 제스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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