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꼬리 잡던 채팅봇 vs 범접못할 AI 천재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데스크 칼럼입력 :2016/05/18 11:33    수정: 2016/05/18 13:0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지난 1966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재직하던 조셉 와이젠바움 박사는 ’엘리자’란 여성 상담사를 고용했다. 이 여성은 전화로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응대해줬다.

엘리자는 차츰 탁월한 정신과 치료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엘리자가 주고 받은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환자: 전 항상 침울해요.

엘리자: 침울하다구요? 안됐군요.

환자: 제 남자 친구가 이 곳을 소개해줬어요.

엘리자: 당신 남자 친구가 소개해줬다구요?

환자: 도움이 필요해요.

엘리자: 도움이 필요하다구요? 어떤 도움이 필요하죠?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해주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엘리자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히려 와이젠바움이 당황했다. 엘리자는 컴퓨터 과학자였던 와이젠바움이 개발한 일종의 채팅봇이었기 때문. 사람들의 반응에 놀란 와이젠바움은 결국 엘리자를 폐쇄했다.

영국 새크빌에 있는 앨런 튜링 기념관의 튜링 기념상.

■ 잘못 알려졌던 튜링 테스트

실제로 엘리자가 나눈 대화를 보면 특별한 것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말꼬리’를 잡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고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엘리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자기 얘길 잘 들어주고, 공감해줬기 때문이다.

요즘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아마도 알파고 때문일 것이다. 컴퓨터가 바둑 최고수 이세돌 9단과 대국에서 완승한 충격이 꽤 컸다. 바둑 대국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충격파는 더 컸다.

사람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에 대한 로망은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우리에겐 ‘튜링테스트’로 잘못 알려진 앨런 튜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튜링이 1950년 발표한 ‘컴퓨팅 기기와 지능(Computing Machine and Intelligence)’가 그 효시다.

한 때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면서 전 세계를 흥분시켰던 유진 구스트만.

튜링은 이 논문에서 “모방게임을 한 뒤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란 문제의식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다. 이 논문에서 ’튜링테스트’로 알려진 부분엔 이렇게 서술돼 있다.

“50년 뒤에는 보통사람으로 구성된 질문자들이 5분 동안 대화를 한 뒤 (컴퓨터의) 진짜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이 70%를 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서 나온게 바로 ’30%를 속이면 튜링 테스트 통과’란 오해였다. 그리고 이걸 토대로 2년전 유진 구스트만이란 컴퓨터가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 조지아공대 한 교수의 깜찍한 실험

그런데 요즘 나오는 인공지능을 보면 ‘튜링 테스트’란 말이 무의미하다. 이젠 사람을 속이는 따위는 고려 대상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써서 문학상 예심을 통과하는가 하면, 로펌에 입사하기도 한다.

급기야 대학 강의실에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주 화제가 됐던 미국 조지아공대의 인공지능 조교 얘기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신 보도를 토대로 한번 살펴보자.

조지아공대 아쇽 고엘(Ashok Goel) 교수는 학기초 질 왓슨이란 강의조교(TA)를 한 명 고용했다. 이 조교는 학기 내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조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물론 온라인 상에 올라온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었다. 이번 방식으로 교수의 과중한 강의 업무를 덜어줬다. 대학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의조교였다.

고엘 교수는 학생들이 학기말 시험을 제출한 뒤에야 왓슨이 사실은 인공지능 채팅봇이었다고 공개했다. 왓슨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IBM의 도움을 받아서 개발한 채팅 봇이다.

아쇽 고엘 교수. (사진=조지아공대)

당연히 학생들은 ‘깜빡 속았다’는 반응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어떤 학생은 질 왓슨을 우수 조교로 추천할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꼼꼼하게 잘 도와줬단 얘기다.

고엘 교수는 앞으로 인공지능 조교를 사업화하는 방안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또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사람 조교를 대체할 진 알 수 없지만, 질문에 답하는 기능은 온라인 공개 강좌에선 굉장히 유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영화 속 무수한 장면들, 이젠 현실에서도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영화 ‘그녀(HER)’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것도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란 사실을 알면서 사랑에 빠지는 얘기다. 또 얼마 전엔 구글이 인공지능에게 문학작품을 읽힌 뒤 창작 활동을 하는 실험 결과를 담은 논문을 공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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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모방게임’을 활용한 말꼬리 잡기 대화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AI는 이젠 전문 영역에까지 발을 들여놓고 있다. 벌써부터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상당 부분 대체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제 인간은 컴퓨터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봤던 수 많은 장면들과 익숙해지는 훈련이 필요할 수도 있단 얘기다. 물론 ‘디스토피아’ 같은 장면은 빼고.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