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 진화…산업시대 vs 소셜시대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소통 방식 뚜렷한 차이

데스크 칼럼입력 :2016/02/25 13:45    수정: 2016/02/26 08:2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으로 촉발된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한 영화를 떠올렸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1939년작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란 영화다.

흑백 시대 수작인 이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한 순박한 시골 소년단 지도 선생이 느닷없이 상원 의원에 지명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결론도 미국의 전형적인 결말로 맺어졌다.

이 영화의 압권이 바로 대미를 장식한 ‘무제한 토론(filibuster)’ 이다. 스미스 의원은 법안을 막기 위해 무려 23시간 16분 동안 연설을 한다. 어제 오늘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때 이 영화가 거론된 건 이 때문이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 참여 의원들, 페이스북 통해 실시간 소통

물론 영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산업시대와 소셜 미디어 시대 정치토론의 달라진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그 얘길 하고 팠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선 꼬박 하루 가까이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지역구에서 편지가 쏟아져들어온다. 반대파의 선전에 넘어간 사람들이 스미스 의원을 보낸 비난 편지들이다. 텁수룩한 얼굴로 편지를 확인하던 스미스 의원은 결국 쓰러지고 만다.

영화 특유의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산업 시대 정치 토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영화 속 장면엔 산업시대의 한계도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러다보니 스미스 의원은 연설을 통해 자기 입장을 알리는 것 외엔 달리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대중 연설은 가능했지만, 양방향 소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 소셜 미디어 시대 필리버스터의 모습은 어땠을까? 지금 국회에서 사흘째 계속되고 있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한번 살펴보자.

(사진=은수미 의원 페이스북 페이지)

연설자들 중엔 ’테러방지법’에 정통한 의원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 의원도 있다. 기본적인 법 취지와 내용은 알고 있지만, 최소 5시간 이상 토론을 이어가는 것이 간단하진 않다. 게다가 우리 국회법에선 주제와 관계 없는 연설은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소셜 미디어가 적절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놓고 보면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어제 세 번째 주자로 등단해 10시간 18분 동안 연설한 은수미 의원이었다. 은 의원은 23일 오후 7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어떤 내용으로 하면 좋을지 자료 및 의견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올라온 내용을 받아 국민의 의견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같이 밤을 샌다, 생각해주셔요. 여러분의 견해를받아 필리버스터 하겠습니다.”

페이스북을 통해 의제 설정과 여론 수렴을 하겠다고 공언한 셈. 은 의원의 이 글엔 2천개를 웃도는 댓글이 달렸다. 여기엔 격려 댓글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구체적인 논점을 제시한 글들도 적지 않았다.

은 의원은 연설을 끝낸 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인터뷰에서 페이스북에 올라온 국민 의견을 상당 부분 반영했다고 밝혔다.

“페이스북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봤더니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테러방지법이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인지에 대한 지적을 해달라는 말씀이 있었고요. 가장 많은 달린 댓글이 국정원에 막강한 권력을 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달라는 거였어요.”

■ 의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적는 사이트도 등장

아예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적어보자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필리버스터닷미(filibuster.me)란 사이트였다. 24일부터 관심을 모은 이 사이트는 단상에 오른 의원들의 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필리버스터닷미 사이트엔 25일 오후 1시 현재 2만6천500건 가량의 의견이 올라와 있다. 연설을 했던 최민희, 김제남 의원 등은 이 사이트에 올라온 글 중 일부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양방향 직접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사이트도 등장했다.

필리버스터닷미는 아예 직접 소통의 가능성까지 보여줬다. 연설자로 등장한 의원들이 여기에 올라온 글들을 적절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7번째 주자로 등장한 김제남 의원 트위터에는 아예 '시민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겠다는 글까지 올라왔다. 필리버스터닷미에 하고픈 말을 올려주면 등단하는 의원들이 소개해주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까지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지지 정당이나 정치관에 따라 이번 ‘릴레이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다를 것이다. 열렬하게 지지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릴레이 필리버스터가 정치 토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소셜 미디어와 오프라인 정치가 비교적 잘 결합되면서 활발한 토론의 불씨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속 필리버스터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지만 현실 속 필리버스터는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이번 릴레이 필리버스터를 주도하는 쪽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게 쉽진 않아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건, 승리한 시점에 영화가 끝났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진다면, 또 다른 반전이 따라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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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이번 필리버스터 역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과 여부에 상관 없이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 여야가 왜 ‘테러방지법’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됐다.

영화는 끝이 있지만, 현실정치엔 끝이 없다. 끝없는 토론과 협상이 있을 뿐이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 ‘토론과 협상’이란 현실 정치의 양대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적어도 한국 정치의 해피엔딩을 기대해볼 순 있지 않을까?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