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FCC-통신사, 흥미진진한 '망중립성 수싸움'

통신업계 "절차 위반" vs FCC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대" 맞불

데스크 칼럼입력 :2015/08/07 14:59    수정: 2015/08/07 15:34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에서 망중립성 공방을 둘러싼 두뇌싸움이 갈수록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다. 통신사업자들의 법정 공세에 맞서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초고속 인터넷 보급’이란 무기로 은근히 여론전을 펼치는 모양새다.

잠시 시간을 더듬어보자. FCC는 지난 2월 유선 뿐 아니라 무선 사업자에게도 ‘커먼캐리어’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초강력 망중립성 원칙을 마련한 뒤 4월 공식 발표했다.

그러자 북미무선통신사업자협회(CTIA)를 비롯한 주요 통신 단체들은 곧바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또 소송이 끝날 때까지 망중립성 원칙 적용을 잠정 유보해달라고 청원까지 함께 제출했다. 하지만 법원이 ‘잠정 유보’ 요청을 기각함에 따라 지난 6월부터 망중립성 원칙이 본격 적용되고 있다.

FCC 입장에선 한 숨 돌린 상황.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난제가 남아 있다. 오는 12월부터 콜롬비아 자치구 항소법원에서 ‘망중립성’의 합법성을 놓고 공방을 벌여야 한다.

톰 휠러 FCC 위원장

■ '항소법원 패소' 아픈 기억 갖고 있는 FCC, 회심의 반격?

이 대목에서 FCC는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지난 해 초 연방항소법원에서 한 차례 패소한 것. 당시 연방항소법원은 FCC가 지난 2010년 공표한 ‘오픈인터넷 규칙’에서 정보서비스사업자에게 차별금지와 차단금지 의무를 부과한 것은 월권이라면서 피고 패소 판결을 했다. 이 때 쟁점이 된 조항이 통신법 706조였다.

FCC가 올 들어 마련한 새 망중립성 원칙에서 ‘커먼캐리어 의무 부과’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 때문이다. ‘커먼캐리어’도 아닌 ISP들을 규제하려다 항소법원에서 일격을 맞은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을 들인 것이다. 올해 FCC가 유선 뿐 아니라 무선 사업자까지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인 ’커먼캐리어’로 분류한 것은 위험 요소를 아예 잘라버리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통신업계의 반격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ISP를 타이틀2로 변경한 것은 절차 위반이라면서 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소송이 올 12월부터 항소법원에서 본격 시작된다.

소송을 앞둔 FCC의 속내가 어떨 지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FCC의 야심작인 망중립성은 이미 지난 해 초 한 차례 패배하면서 ‘원인 무효’가 된 이력이 있다. 이번에 또 다시 패소할 경우엔 사실상 재기 불능 상태로 내몰릴 수도 있다.

지난 해 12월 망중립성 관련 토론회 도중 일부 시민들이 ISP 재분류 요구를 하고 있다. (사진=씨넷)

물론 FCC는 이번엔 ’706조’를 둘러싼 공방의 씨앗은 아예 잘라냈다. 지난 해 연방항소법원이 판결문에서 “정 규제하려면 ISP를 재분류하라”고 했던 부분을 그대로 이행했다.

하지만 FCC가 망중립성 원칙을 확정하기 위해 ISP를 재분류한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부분도 법적으론 논쟁의 여지가 적지 않다. 통신 사업자들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질 경우엔 FCC가 의외의 일격을 당할 수도 있다.

FCC의 최근 행보가 예사롭지 않은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몇 가지를 한번 꼽아보자.

■ 올초 초고속 인터넷 최저 기준 상향 조정

우선 FCC는 지난 1월초 초고속 인터넷의 최저 기준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4Mbps였던 초고속 인터넷 다운로드 최저 기준을 25Mbps로, 1Mbps였던 업로드 속도를 3Mbps로 높였다.

당연히 명분은 있다. 요즘 미국에서 인기 있는 넷플릭스의 초고화질(HD) 스트리밍 서비스 같은 것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최소한 5Mbps 전송 속도는 보장돼야 한다. 충분히 고려 가능한 명분이다.

문제는 이렇게 할 경우 미국에서 초고속 인터넷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가구 수가 지금보다 세 배로 늘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가구중 6.3%가 종전 기준인 '다운로드 4Mbps/업로드 1Mbps' 속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상향 조정한 기준을 적용할 경우 13.1%가 추가로 초고속 인터넷 미수혜 계층으로 분류된다.

FCC는 초고속 인터넷 기준을 상향 조정한 지 한 달 여 만에 망중립성 원칙을 공개했다.

지난 해 5월 FCC가 급행회선 허용을 골자로 하는 망중립성 수정안을 발표한 뒤 FCC 본사 건물 앞에는 수 많은 항의 인파들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 하지만 이후 FCC는 입장을 바꿔 강력한 망중립성 원칙을 들고 나왔다. (사진=씨넷)

그런데 이번엔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FCC는 6일 초고속 인터넷 연례 조사 방법 변경과 관련한 공개 질의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FCC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 실태 조사를 할 때 속도 외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게 어떻겠냐는 화두를 던졌다. 망이 신뢰할 만한지, 지나치게 느리지는 않은 지 등도 함께 고려해서 초고속 인터넷 수혜 계층을 잡자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유선 일변도 조사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함께 던졌다. 무선과 위성을 포함한 다른 방식 인터넷 도입 상황도 함께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 이용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상황을 감안하기 위해선 무선 인터넷 품질에도 좀 더 면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FCC의 이런 방침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쉽게 거부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최근의 통신 상황을 시의적절하게 잘 고려한 행보처럼 보인다.

■ 통신법 706조, 이번엔 어떻게 작용할까

그런데 난 FCC의 정책 변화가 단순히 “미국인들의 초고속 인터넷 상황을 잘 반영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12월부터 본격 시작될 소송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 얘길 하기 위해선 지난 해 1월 항소법원 판결문을 다시 뒤적여볼 필요가 있다. 당시 많은 국내 언론들이 FCC의 완패란 논조로 기사를 썼다. 하지만 당시 FCC가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그 중 하나가 통신법 706조와 관련이 있었다.

미국 통신법 706조는 FCC 및 주정부에게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합리적이고, 시의적절하게 이용가능하도록 보급을 촉진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또 의회는 정기적으로 초고속 인터넷 보급정도를 평가하고, 필요한 경우 보급확대를 위한 정책추진 권한을 FCC에 부여하고 있다.

2010년 발표한 ‘오픈인터넷규칙’을 이유로 FCC를 제소했던 버라이즌은 크게 두 가지 요구 사항을 내세웠다. 하나는 FCC가 오픈인터넷규칙을 제정한 것은 월권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쟁점 공방에선 FCC가 완패했다.

또 하나는 ‘통신법 706조’가 FCC에 특별한 권한을 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확인 판결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FCC는 그 동안 706조에 따라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대를 위한 각종 규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망중립성 공방에서 자주 등장하는 ‘부수적 관할권’이 바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톰 휠러 FCC 위원장이 미국 하원 소위원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사진=씨넷)

버라이즌을 비롯한 통신사들은 통신법 706조가 FCC에 규제 권한을 부여해주는 근거 조항이 아니란 판결을 해 주길 원했다. 아예 FCC가 권한을 행사할 근거 자체를 잘라버리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이 부분에선 FCC 손을 들어줬다. 당시 법원은 통신법 706조가 FCC에겐 ‘안전규정(fail-safe)’ 이라고 판단했다. fail safe란 “기계가 고장나서 폭주할 우려가 있을 경우 재해를 막을 수 있는 안전기구”란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706조는 마땅한 다른 규정이 없을 때 FCC가 규제 근거로 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항소법원이 706조 해석을 둘러싼 공방에서 FCC의 손을 들어준 근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속 인터넷 보급률 확대란 '구체적인'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그 정도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던 것.

즉 고속 인터넷 보급 확산을 위해선 망 사업자의 ‘독주’를 견제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선 FCC가 706조를 통해 부수적 관할권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게 당시 판결의 요지였다.

■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망중립성엔 어떤 변수?

최근 FCC가 고도의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것 같다고 판단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한번 따져보자. FCC는 올초 초고속 인터넷 최저 기준을 상향조정했다. 당장 내년 초 발표될 연례 보고서에는 미국인 중 상당수가 ‘초고속 인터넷 미수혜 계층’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다 무선 인터넷 품질까지 정교하게 고려할 경우 어떻게 될까? 미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빈약한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한번 따져보자. 올 12월부터 FCC가 망중립성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ISP들에게 ‘커먼 캐리어’ 의무를 부여한 것이 타당하냐는 공방을 벌이게 된다. 당연히 각종 수치와 명분이 오고갈 것이다.

그 때 FCC는 “자 봐라. 지금 미국의 유무선 초고속 인터넷 실태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라며 수치를 들이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상황에서 FCC가 이 정도 권한도 행사하지 못한다면 706조에 규정된 정책 목표를 실현할 방법이 없다”고 목청을 높일 지도 모른다.

게다가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대란 명분은 1990년대 말 이래 미국의 지상과제였다. 당연히 여론도 FCC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많다. 항소법원에서 벌어질 공방에서 FCC가 한층 유리한 입지를 굳히는 명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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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C의 최근 행보를 이렇게 해석하는 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보는 것일까? FCC 관계자를 취재하지 않은 채 각종 자료를 토대로 쓰는 칼럼이기 때문에 그런 비판을 제기해도 크게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FCC의 최근 행보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 확산이란 명분 못지 않게 망중립성 공방에서 승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란 실리가 강하게 작용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배경 지식을 갖고 올 겨울 시작될 재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겠는가?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