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상공동체가 30년전 쏘아올린 작은 공

데스크 칼럼입력 :2015/04/08 18:10    수정: 2015/04/10 16:49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터넷 세상에 정통한 미국의 사회학자 하워드 라인골드는 1993년 기념비적인 저술을 한편 펴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생소했던 ’가상공동체(Virtual Community)’란 제목을 단 책이었다. 이 책은 이후 초기 사이버 공간을 연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필독서가 됐다.

‘가상공동체’란 저술이 나오는 데는 라인골드가 실제로 경험했던 한 가상공동체가 큰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는 ‘웰(The WELL)’이란 공동체였다.

웰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5년 4월 2일 첫 등장한 공동체다. 1985년이면 인터넷은 고사하고 컴퓨터도 제대로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 또 세계 최대 SNS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태어난 지 불과 1년 뒤였다. 참고로 저커버그는 1984년 5월 14일 생이다.

하지만 스튜어트 브랜드를 비롯한 몇몇 멤버들은 다이얼업 모뎀을 활용한 게시판(BBS)을 하나 만든 뒤 ‘웰’이란 이름을 붙였다. 웰은 ‘Whole Earth Lectronic Link’의 약어였다.

저커버그가 태어날 무렵 결성된 웰은 페이스북 같은 가상공동체의 효시나 다름 없다. 얼굴을 맞대지 않은 공동체란 개념 조차 제대로 성립되지 않던 1980년대에 이미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웰 초기 참가자 중 한 명인 존 캐럴은 7일(현지 시각)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기고한 글을 통해 초기 웰 활동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놨다. 캐럴은 이 글에서 “서로 어울릴법하지 않은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준 공동체 의식은 지금도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고 털어놨다.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이 공동체에서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우리(we)’란 의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초기 핵심 멤버로 활동했던 하워드 라인골드도 가상공동체의 결속력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한 적 있다. 라인골드는 3년 전 애틀랜틱에 기고한 글에서 한 멤버의 아들을 도와줬던 사연을 소개했다.

당시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고 충격에 빠진 한 멤버가 그 사연을 웰에 올리자 순식간에 의사, 간호사를 비롯해 백혈병을 이겨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도움을 줬다는 것. 이들은 또 1만5천 달러를 모금한 뒤 한번도 본 적 없는 웰 공동체 멤버에게 전달해줬다.

하워드 라인골드는 훗날 ‘가상 공동체’란 책까지 쓰게 된 건 웰 공동체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다. 웰은 소셜 미디어란 말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이미 페이스북 못잖은 공동체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웰의 30년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두 어 차례 주인이 바뀐 웰은 1999년 살롱 미디어그룹에 인수됐다. 한 때 의욕적으로 웰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살롱은 누적되는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2005년 웰은 매물로 내놨다. 이 때 매각에 실패했던 살롱은 결국 7년 뒤인 2012년에 웰을 떨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은 웰 그룹이 소유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표현대로 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시대를 앞섰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결실을 거두지도 못했다.

문제는 또 있다.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웰은 이젠 ‘시대에 뒤쳐진’ 공동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상이 모바일과 SNS 시대로 바뀌는 동안 이렇다 할 변신을 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물적, 인적 토대가 취약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은 가상공동체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곳을 거쳐갔던 면면들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초기 핵심 멤버였던 존 페리 발로우, 존 길모어 등은 이후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을 통해 사이버 시민운동을 주도했다. 웰 활동을 ‘가상공동체’란 책으로 정리했던 하워드 라인골드는 그 뒤 ‘참여군중(Smart Mobs)’ ‘넷스마트(Net Smart)’ 같은 뛰어난 저술을 통해 인터넷과 모바일이 몰고온 변화된 사회상을 잘 진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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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돌 생일을 맞은 ‘웰’의 현주소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사이트 디자인은 촌티를 털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유료 가입을 해야 콘텐츠를 볼 수가 있다. 역시 모자라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택한 고육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웰’은 빼놓고는 SNS 역사를 제대로 논할 수 없다. 웰이 있었기에 페이스북 같은 SNS도 좀 더 수월하게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웰의 30돌 생일을 짠~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도 응원을 멈출 수 없는 건 그런 사정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