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명분' 함께 담은 FCC의 '망중립성'

데스크 칼럼입력 :2015/03/13 18:13    수정: 2015/03/13 18:27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야심적으로 마련한 오픈인터넷규칙 전문이 공개됐다. 지난 달 26일 전체회의를 통과한 지 꼬박 2주 만이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FCC 홈 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전문을 바로 내려받았다. (☞ FCC 오픈인터넷 규칙 내려받기)

물론 주요 골자는 이미 여러 차례 보도가 됐다.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를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로 재분류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건 웬만큼 IT 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이다. 또 사상 처음으로 무선 사업자에게 망중립성 의무를 부과한 것 역시 한 달 전부터 이미 공지됐다.

(참고로 미국 통신법은 706조에서 사업자를 크게 네 개로 분류하고 있다. 그 동안 ISP들은 타이틀1인 정보서비스사업자로 분류돼 있었다. FCC는 타이틀1에 대해서는 부수적 관할권만 갖는다. 타이틀2는 유선전화 사업자와 관련된 규정이다. 타이틀2에 소속될 경우 강력한 커먼 캐리어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궁금했던 건 ‘뻔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첫 장면에서 범인을 보여준 뒤 두 시간 가량 계속되는 수사물을 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뻔한 범인’을 어떤 과정과 논리로 잡는지 숨죽이면서 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 한 차례 실패했던 FCC, 이번엔 조심스런 접근

FCC 문건 전문은 4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영어도, 통신 관련 이슈도 썩 편하지 않은 기자가 단숨에 읽어내기엔 조금 버거웠다. (솔직히 털어놓자.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 부분을 읽으면서 FCC의 깊은 고민이 절로 전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FCC가 새로운 망중립성 규칙을 마련하기까지 만만찮은 홍역을 치뤘기 때문이다.

그 얘길 하려면 잠시 시간을 앞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FCC는 지난 2010년 오픈인터넷규칙을 내놨다. 차별금지, 차단금지, 합리적 망관리 등을 골자로 하는 오픈인터넷규칙은 FCC가 공식적으로 망중립성 원칙을 대외에 천명한 첫 시도였다.

하지만 이 시도는 3년 여 만에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지난 해 1월 연방항소법원에서 벌어진 소송에서 버라이즌에 패소했기 때문이다. 당시 법원은 “정보서비스사업자인 ISP에게 차별금지와 차단금지 원칙을 강제한 것은 월권”이라고 판결했다.

FCC가 또 다시 망중립성 원칙을 마련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난 해 5월 ‘급행 회선 허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규칙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여론 수렴 과정에 엄청난 반대 의견이 쏟아져 들어왔다. FCC가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400만 건에 이르는 의견 중 대부분은 ‘급행회선 허용’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FCC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론을 따르자니 항소법원 판결을 거스르는 게 되고, 법원 판결을 따르자니 여론이 가만 있지 않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ISP를 타이틀2로 재분류해버리는 방안이었다. 항소법원이 2010년 오픈인터넷규칙을 무력화한 건 타이틀1인 ISP에게 과한 의무를 부과한 게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FCC 방침을 적극 지원한다면서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ISP 재분류가 '묘안'만은 아니었다. 그럴 경우 케이블 및 통신사업자들이 소송을 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 차례 소송에서 패소한 경험이 있는 FCC는 또 다시 질 경우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할 우려도 있는 상황이었다. FCC가 당초 예정보다 훨씬 늦은 지난 2월에야 새 망중립성 원칙을 내놓은 것 역시 ‘소송을 의식한 때문’이란 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 규정 강화된다고 투자 위축되는 것 아니다

FCC는 이날 공개한 오픈인터넷규칙 전문에 이런 고민을 가감 없이 담아냈다. 눈에 띄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망중립성 원칙’을 도입한다고 해서 통신사들의 투자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란 주장이었다. 실제로 2010년 첫 망중립성 원칙을 발표한 직후 오히려 통신사들의 투자는 늘었다면서 구체적인 수치까지 공개했다.

더 눈에 띄는 부분은 문제가 된 타이틀2 규정 중 극히 일부만 적용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FCC는 정교하게 잘라낸 규칙(Carefully-tailored rules)이란 표현을 되풀이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또 타이틀2 관련 규정 중 700개 이상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계속 부각시켰다. 아예 가볍게 건드린(light-tough) 규제 프레임워크를 적용한 ‘21세기를 위한 타이틀2(Title II tailored for the 21st century)’란 표현까지 동원했다.

문건을 읽는 내내 FCC가 행여 있을 지 모를 소송에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사업군 재분류’를 놓고 벌어질 합법성 논란을 미리 피해가려는 의도가 한 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었다. “규제가 강화될 경우 투자 유인이 줄어든다”는 통신사들의 논리도 적절하게 반박하고 있었다. 규제 수위는 최대한 낮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투자 위축”이란 통신사들의 반발을 동시에 겨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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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망중립성 도입을 둘러싼 공방은 이제 막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FCC 위원 구성상 전체회의 통과는 기정 사실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과연 양쪽을 동시에 때리는 FCC의 절묘한 접근법이 앞으로 이어질 공방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무협지 못지 않은 흥미진진한 미국의 망중립성 공방을 지켜보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양측의 두뇌 싸움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