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상식인 기업문화가 한국에선 '꿈'

전문가 칼럼입력 :2014/03/18 09:32    수정: 2014/03/19 11:09

임백준
임백준

“꿈의 직장 제니퍼소프트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33가지”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신선하고 놀라웠다. 한국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자신감 넘치는 회사이기에 신선했고, 그들이 특별한 선언(manifesto)처럼 제시한 33개의 항목이 사실은 상식적인 내용이라서 놀랐다. 평범한 상식을 말하기 위해서 ‘꿈의 직장’이 되어야 하는 한국의 현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최근에 어떤 은행은 직원들 연수를 진행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군대의 얼차려 혹은 과열된 종교집회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기마자세를 한 채 고함을 지르는 은행원의 모습이라니. 그 엉거주춤한 자세가 사실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에 모른 척 외면하기도 어렵다. 진지한 얼굴로 기마자세를 한 모습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기이한 슬픔을 자아낸다. 지금 내가 다니는 월가의 회사는 일반적인 회사들보다 급여가 조금 높다는 점을 빼면 지극히 평범하다. 회사의 분위기나 문화는 미국 회사들의 평균적인 모습과 다르지 않다. 오래 전에 근무했던 루슨트테크놀로지나 벨연구소의 환경도 거기서 거기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보면 모두 관료주의에 물든 ‘동부인’의 회사로 보일 것이다. 이런 밋밋한 문화를 기준으로 제니퍼소프트의 '33가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한국의 '꿈의 직장'에서 제시하는 철학이 미국에서는 고리타분한 동부에서마저 상식적인 수준이라는 점을 전하고 싶었다. (1) 전화 통화 시에 “지금 어디예요?”, “뭐 하고 있어요” “언제 와요?”라고 묻지 마요. 감시할 의중도 없잖아요. (3) 근무 외 시간엔 가급적 전화하지 마요. 사랑을 속삭일 게 아니라면! 33가지 중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항목이다. 처음에는 두 항목을 읽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누구한테 전화를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고 나서야 근무 시간이 아니면 회사일 때문에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하지 말고, 혹시 하더라도 "지금 어디예요?"라는 식의 질문을 하지 말라는 뜻임을 이해했다. 미국에서도 현장에 깔려있는 소프트웨어에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하면 당연히 전화를 받기도 한다. 회사의 문화라기보다는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서 전화를 받을 일이 생기거나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화를 받았을 때 위의 항목에서 이야기하는 종류의 질문을 받은 적은 없다. 사생활 침해이기 때문이다. 만약 개념 없는 상급자가 “Where are you now?”라고 물으면 하급자는 냉정하게 “Why are you asking?”하고 말해도 좋다. 위에서 말하는 “감시할 의중”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마 한국에서는 상급자가 부하 직원의 사생활을 감시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다는 말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감시할 의중”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2) “회의 중인데 좀 있다 전화할게”. 아니거든요~ 가족 전화는 그 어떤 업무보다 우선이에요. (4) 퇴근할 때 눈치 보지 마요. 당당하게 퇴근해요. 회의 중에 개인 휴대폰이 울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화를 하기 위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간다. 그에 대해서 눈총을 주거나 뭐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개인전화 때문에 밖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이 상급자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 “Excuse me”라고 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출근과 퇴근도 큰 틀이 갖춰져 있을 뿐, 반드시 몇 시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9시쯤에 출근해서 6시쯤에 퇴근한다. 10시에 출근해서 조금 늦게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8시에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부하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에 대해서 신경을 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른 시간인 아침 8시에 인도나 런던에 있는 직원들과 회의를 할 일이 있으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8시까지 출근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확인하는 것이 관례다. 하급자에게는 물론 개인적이 상황에 따라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출근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그냥 “오늘은 재택근무 합니다.”라고 이메일을 보내고 집에서 일해도 좋다. 정상적인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으면 출퇴근시간과 재택근무는 개인의 선택이다. (뉴저지에 있는 AT&T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거의 매일 재택근무를 하고, 한 달에 한두 번만 사무실에 출근한다. 출퇴근이나 재택근무와 관련해서 월스트리트는 상당히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근길에 가끔 링컨터널이 막히거나 해서 9시 30분에 출근을 하게 되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이 없고,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5시 30분에 퇴근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일은 없다. 눈치를 본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아서 다른 사람보다 늦게까지 남아있을 때가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더 많은 돈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마저 존재한다. 지면이 짧아서 마쳐야 하지만 하나만 더 살펴보자. (5) 우르르~ 몰려다니며 같은 시간에 점심 먹지 마요. 같이 점심 먹는 것도 때로는 신경 쓰여요. 시간은 자유롭게. 먹고 싶은 것을 먹어요. (8) 회식을 강요하지 마요. 가고 싶은 사람끼리, 자유롭게 놀아요. 이 항목을 읽으면서 20년 전에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점심을 먹던 풍경이 떠올랐다. 정말 그랬다. 12시 종이 땡 울리면 다 함께 몰려나가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도 하나로 ‘통일’을 시키곤 했다. 미국에서는 점심을 먹는 시간이 따로 없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식으로 각자 알아서 해결한다. 11시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 사람도 있고, 3시 30분이 되어서 점심을 먹는 사람도 있다. 점심시간을 전후해서 운동을 하러 헬스클럽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나가거나, 회사건물 앞의 타임스퀘어나 브라이언 파크에 나가서 산책을 해도 좋다.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레스토랑에 앉아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길가의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사서 길가 벤치에 앉아서 먹기도 한다. 무엇을 언제 누구와 먹는가 하는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선택이다. “33가지”의 나머지 항목도 하나씩 다 짚어보고 싶지만, 지면이 부족하다. 어쨌든 척박한 한국 기업 문화에 대항해서 조용히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제니퍼소프트에게 커다란 박수를 보내고 힘껏 응원을 해주고 싶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는 수영장과 같은 ‘시설’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이다. 출퇴근시간이나 점심시간 같이 작고 소소하지만 기본적인 개념들 말이다. 예컨대 은행원들의 기마자세를 보면서 씁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어야, 정상이다. 직원들이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중요한 일에 힘껏 몰두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우스운 모습을 보면 웃고, 터무니없는 모습을 보면 분노를 해야, 정상이다. 억눌리고 착종되어 괴물처럼 뒤틀린 감정을 품은 사람은 언제나 눈치를 본다. 눈치를 보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비정상이다. 제니퍼소프트의 '33가지'는 단순히 형식적인 제스처에 불과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믿음이 간다. CEO의 의지도 엿보이고, 직원들의 자신감도 느껴진다. 멋있다. 끝으로 '33가지' 마지막 항목을 보자.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정한 핵심은 바로 이 항목 안에 담겨있다. 밑줄을 좍 긋자. 33. 회사를 위해 희생하지 마요. 당신의 삶이 먼저에요.한국에서 이런 회사가 '꿈의 직장'이 아니라 상식적인 수준의 회사가 되는 날을 진심으로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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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준 IT컬럼니스트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 모건스탠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맨해튼에 있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분산처리,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관계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