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몰아보기'에 담긴 변화의 메시지

전문가 칼럼입력 :2013/12/19 12:52    수정: 2013/12/19 13:27

이윤수
이윤수

최근 '몰아 보기(binge-viewing)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에서 고른 올해의 단어 후보(최종 선정 단어 ’selfie’외 7개) 로도 선정됐다. 이미 90년대부터 사용됐던 몰아보기가 올해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넷플릭스가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등 오리지널 드라마의 시즌 전체 에피소드를 동시에 출시하면서였다.

보통 미국 드라마가 일주일 단위로 방영하고, 온디멘드(on-demand) 비디오도 현재 방영 중인 시즌은 일부만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감안하면 넷플릭스의 시즌 전체 동시 출시는 파격적이었다. 같은 뉴미디어인 아마존도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오리지널 드라마를 출시하기로 한 걸 보면, 넷플릭스의 결정이 과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닐슨 조사에 의하면 넷플릭스 이용자의 88%는 몰아 보기(하루 3편 이상의 에피소드 시청) 경험이 있다. 비단 올해 들어서 갑자기 생긴 경향이 아니다. 뷰비쿼티 조사에 의하면, 이미 2012년 미국 시청자의 56%는 몰아 보기 성향을 갖고 있었다.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의 드라마 몰아 보기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온디맨 뿐 아니라, 드라마 여러 편을 연달아 편성해 내보내는 케이블 채널도 있다. 심지어는 오래된 드라마 전체를 요약해 주는 프로도 있다.

'몰아 보기’는 이미 온디멘드 시대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슨 대단한 경향인 양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상이 아니라 전략이다. 단순히 몰아 보기 시청 형태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현상에 부응하는 새로운 미디어 '유통 방식'을 넷플릭스가 과감하게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넷플릭스가 간파한 것은, 사람들이 몰아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콘트롤’, 즉 자유다. 넷플릭스의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는 이것을 책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200년 전엔, 많은 소설이 잡지에 기고되었다. 그건 연작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책 생산 비용이 충분히 낮아지면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스케줄에 맞춰 모든 장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컨트롤을 갖게 되었고, 책은 이제 구식이 된 잡지의 연재 모델과의 경쟁에서 크게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비디오에서도]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데, 소비자들은 점점 더 컨트롤을 원할 것이란 거다. 그들은 자유를 원한다.”

소비자에게, 대중에게, 더 많은 자유와 자율을 주는 것은 시대적 현상이다. PC와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대중에게 미디어 제작과 유통의 자유를 주었듯, 미디어 소비도 마찬가지로 자유를 지향한다. 이런 소비의 민주화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

첫째는 시간적 자유이다. 일정한 시간에 특정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하는 환경에서, 원하는 시간에 시청할 수 있는 권리가 소비자에게 주어진다. 이를 위한 온디맨드 환경은 이미 보편적이다.

둘째는 장소적 자유이다. 어디서든 시청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그 첨병에 있다. 앞으로도 미디어 소비 환경은 고비용의 빅스크린에 집중되기보다는 다양한 퍼스널 스크린으로 분산되는 방향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리게 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누구보다도 많은 플랫폼을 지원하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술 회사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선택적 자유이다.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자유는 풀어야 할 족쇄가 많다. 아직 TV 카르텔은 완전한 접근 자유를 주지 않는다. 복잡한 매체∙지역 윈도(window)별 홀드 백(hold back) 정책-판권 지연 정책-을 통한 매출 극대화 공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특히 지역적 홀드 백은 요즘 같은 글로벌 인터넷 시대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지만, 여전히 가장 큰 장애물이다. 또한 불법 복제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넷플릭스에도 쉽지만은 않은 문제다. 단순한 비디오 유통이 아니라 가입자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 사업 모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에 진출한다면, 차별화 포인트는 바로 오리지널 드라마의 미국-한국 동시 개봉이 될 것이다.

‘몰아 보기’ 단어를 주목하게 한 넷플릭스의 시즌 전체 에피소드 출시 전략도 결국 소비자에게 주는 선택적 자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몰아 보기’ 행태의 고객 니즈를 쫓겠다는 것이 아니다. 기존 TV 산업도 시청자에게 더 많은 선택적 자유를 주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컴캐스트 같은 케이블 회사도 온디맨드 라이브러리를 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MTV나 디즈니 같은 TV 네트워크는 방영 전의 새로운 쇼의 전체 에피소드를 자사 앱을 통해 TV 방영 전에 미리 공개하는 실험도 한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소비자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시즌 따라잡기[catchup]를 한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최신 시즌으로 유입되면서 시청률이 크게 향상된다. ‘브레이킹 배드’의 마지막 시즌 시청률이 전년보다 배가 된 것은 넷플릭스 덕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돈이 되면 다툼도 있다. 미국의 경우, 방송 중인 시즌에 대한 TV 네트워크의 온디맨드 권한은 보통 최신 5편의 에피소드로 제한돼 있다.

최근에 이것을 전체 에피소드로 확대하는 권리[in-season stacking rights]를 스튜디오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매 영향력이 높아진 넷플릭스가 스튜디오에 해당 드라마 지급하는 비용을 인하해줄 것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해당 온디맨드가 다른 곳에서 많이 노출될수록 자신들에겐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다.

소비의 민주화라 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소비자의 권력이 배제된 힘겨루기라는 생각이다. 물론 넷플릭스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moments of truth]'의 경쟁을 위한 당연한 대응일 것이다. 소비자가 소비를 결심하는 그 결정적 순간에, 더 광범위한 선택적 자유를 제공하는 서비스가 선택을 당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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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 그런 경쟁을 하다 보면, 모두 자기 패를 다 공개해야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소비자가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선봉에 지금은 넷플릭스가 있다. 한국은? 사전 제작 시스템은 엄두도 못 낼 한국은 한참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넷플릭스의 월 7.99달러보단 한참 모자란 월 4천900원짜리 푹에서 운 좋게 우연히 발견한 '모래시계’를 '몰아 보기’하는 것도 썩 괜찮은 ‘선택’ 같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윤수 IT컬럼니스트

디지털 경험 연구가, 테크 칼럼리스트, 미래 전략가. 2012년까지 SK텔레콤에서 유비쿼터스 및 뉴미디어 사업 전략 및 기획 업무를 담당했었고, 이후 디지털 경험 연구를 위한 DIGXTAL LAB을 설립하였으며, 미래 전략 컨설팅 그룹인 에프앤에스컨설팅에 참여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