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싸우는 노동자와 AI를 부리는 사용자

[이균성의 溫技] AI와 교육개혁의 문제

인터넷입력 :2019/11/15 10:23    수정: 2019/11/18 16:45

교육(敎育)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어학사전을 보니 이렇게 돼 있다.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단어의 뜻은 그러하되 이를 철학적으로 정의(定義)하자면 참 다양한 견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교육’이란 단어는 아주 좁은 의미로 쓰고자 한다. ‘개별 인간이 업(業)을 갖도록 가르침’ 정도로 말이다. 더 줄이자면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직업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 문제는 늘 우리 사회의 최대 숙제 가운데 하나다. 그게 개인의 업(業)과 신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입시제도가 그렇다. 수많은 논란을 거치고 최선을 다해 방안을 찾아내도 결국 누구도 만족하지 못한다. 어떤 제도를 도입하든 결국 개인의 업(業)과 신분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기회의 균등’과 ‘과정의 공정’을 외치지만 ‘정의로운 결과’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스럽기만 하다.

(사진=Pixabay)

존재하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 서로 편을 나눠 혈안이 돼 물고 뜯는 형국이 지금 우리 사회가 논하는 교육 담론처럼 보인다. 그 무의미한 패싸움 속에서 우리가 잃는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진짜로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그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더’ 나은 업(業)과 ‘더’ 나은 신분을 갖으려고 한다. 여기서 ‘더’가 중요하다. 누구보다? 주위의 친구나 친지보다. 보통은 그렇다.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힘들고 모지락스러워지는 출발점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대개 닿을 수 없는 먼 적(敵)보다 가까이 있는 얄미운 친구나 친지를 더 미워한다. 결과적으로 우매한 일이다. 자신과 주위를 갉아 먹는 일이다. 그런데 이제 그럴 ‘여유’마저도 없는 듯하다. 주위의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공(可恐)할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쩜 우리 모두를 삼켜버릴지 모른다.

인공지능(AI)이 그것이다. AI를 왜 우리 모두의 가공할 적이라고 하는가. 우리 대부분은 사용자가 아니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AI는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AI를 만드는 노동자는 없다. AI는 사용자가 만들거나 사용자를 위해 만들어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AI가 인간 노동자보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더 완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으로 AI와의 노동 경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직업교육은 간단히 말하면 ‘일을 위해 뇌와 육체를 단련’하는 것이다. 문제는 AI가 훈련받는 바도 정확히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경쟁에서 인간은 결코 AI를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렇다. 그 현실이 우리가 싸워야 할 진짜 적(敵)이다. 이제 인간은 무슨 일을 해야 하나. AI는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찾고 개발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게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면 인간의 뇌(腦)와 AI의 차이부터 알아야 한다. AI는 인간 뇌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AI는 빠른 속도로 인간 뇌의 기능을 점령해오고 있지만 쉽게 모방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미국 MS의 AI 전문가 샤오우엔 혼 박사가 14일 지디넷코리아 주최 ‘ATS 2019’ 컨퍼런스에서 한 강연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꽤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할 듯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 뇌와 AI가 추구하는 지능(intelligence)은 다섯 층위로 구분된다. 계산과 기억(memory), 지각(perception), 인지(cognition), 창의력(creativity), 지혜(wisdom) 등이다. 계산과 기억의 층위에서는 이미 인간이 AI를 따를 수 없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AI는 지각 층위에서도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지각은 말을 알아듣고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떤 경우 인간 뇌보다 뛰어나다. CCTV를 보며 용의자를 찾아내는 일 같은 경우가 그런 예다.

인지 층위에서도 AI는 인간 뇌와 맹렬히 경합하고 있다. 인지는 일반적인 일에 필요한 뇌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정보를 바탕으로 대상을 이해하고, 추론하고, 계획하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구글의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으며 이 층위에서도 AI가 인간을 넘을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제는 바둑 뿐 아니라 인간의 업무 대부분의 영역이 빠른 속도로 위협을 받는 중이다.

혼 박사는 그러나 당대의 AI가 창의력과 지혜의 층위에서는 인간 뇌를 능가하지 못할 것으로 봤다. 시(詩)나 소설을 쓰는 AI 실험이 일부 진행되고 있지만 혼 박사는 "창의성 면에서 인간이 100라면 컴퓨터는 0"이라고 말했다. 이세돌 9단이 절대 불리한 게임에서 한 판이라도 이길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그것인 셈이다. 창의력의 층위에서 그러하므로 지혜의 층위에서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다.

혼 박사의 강연은 AI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AI와 싸우려 하지 말고 AI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AI와 경쟁하는 노동자가 되지 말고 AI를 부리는 사용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는 아직 이와 정반대라는 점이다. 교육계든 기업이든 노동계든 모두 다 ‘AI와 싸우는 노동자’ 만 생각하고 있다.

학교든 직업교육이든 교수법과 교육내용이 AI에게 이미 따라 잡혔거나 곧 따라잡힐 영역에 치중돼 있다. 특히 AI와 경쟁이 거의 불가능한, 지능의 최저층위인 계산과 기억(memory)에 집중돼 있다. 교육을 위한 오프라인 공간과 라이선스(면허)를 중시하는 제도 또한 결국엔 ‘AI와 싸우는 노동자’를 양성하는 근대적 유산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시스템 혹은 메뉴얼로 인간을 다루는 일 또한 그러하다.

인간은 시스템과 매뉴얼로 절대 AI를 이길 수 없다. 인간이 AI를 이기기 위해서는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자유는 욕망과 연결돼 있다. 그건 AI에겐 없는 것이다. 오직 욕망만이 필요를 만들어낸다. 필요를 만들어내는 일이 곧 창의다. 인간은 욕망에서 출발한 필요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AI를 부려야 한다. 이런 인재가 많은 기업이 성공한다. 그런 나라가 더 부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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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그러므로 욕망과 자유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속에서 필요를 발굴하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게 교육의 핵심이다. 필요가 생기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그게 곧 일이고 업(業)다. 이것이야 말로 당대와 가까운 미래의 AI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정부든 교육계든 기업이든 노동계든 이에 대한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욕망이 AI를 다루는 무기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AI와 싸우는 노동자가 될 것인가, AI를 부리는 사용자가 될 것인가. 우리 자식은 둘 중 무엇이 되길 희망하는가. 만약 후자가 답이라고 여긴다면 교육에 관한 과거의 모든 발상을 전복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안개 낀 아득한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가야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