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공공서식, 국제표준과 멀어지다

행안부-한컴의 .hwp 문서편집 무료 프로그램 배포 걱정된다

데스크 칼럼입력 :2019/08/21 14:44    수정: 2019/08/22 11:09

행정안전부가 한글(.hwp) 파일에 종속된 공공서식 중심 행정체계 개선에 손을 놓았다. 진영 장관의 말마따나 '국정운영의 중추' 부처인 행안부가 지난 2년간 국제표준 문서 포맷(.odt)를 끌어안으려는 노력과도 상충하는 결정을 내린 배경을 짐작하기 어렵다.

공공서식을 .hwp 파일로 다루는 것 자체는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국가의 행정업무 전반이 특정 SW에서만 온전히 처리되는 문서 포맷으로 돌아가는 것이 근본 문제다. 유료 SW 기능을 대신할 무료 SW를 만든다 해도 특정 기업 기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료 SW 보급과 맞물려 기존 공공서식이 더 활용된다면, 종속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도 억제될 수 있다.

이번 발표에선 행안부가 수천건에 달하는 공공서식 가운데 .hwp 파일을 .odt로 전환하거나, 불필요한 서식 요구 절차를 억제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공적 기록 생산, 보존 활동이 특정 기업에 종속된 수단으로 유지되는 건 부당하다는 오랜 비판에 둔감해진 모습이다.

행안부와 한컴이 공공서식 편집툴 무료 보급을 추진한다. 한글(.hwp) 파일에 종속된 공공서식 중심 행정체계의 개선 여지는 더 좁아질 우려가 있다. [사진=Pixabay]

■ 다음달부터 공공서식 편집툴 무료 보급 추진한다는데

지난 20일 업무협약을 맺었다는 행안부와 한글과컴퓨터의 발표 내용을 보면, 양측은 오는 9월 1일부터 .hwp 형식의 공공서식 작성·제출 전용 무료 프로그램을 배포할 계획이다. 국민들이 민간기업 한컴의 유료 소프트웨어(SW)를 안 사도 공공서식 작성·제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행안부는 이 조치의 배경으로 '국민 불편 해소'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간 민원인이 일일이 출력해 수기 작성하고 오프라인 방문 제출해야 했던 불편이나, 기관이 제공하는 견본 서식을 편집할 수단이 없어 그 서식 자체를 활용할 수 없었던 불편이 누그러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부처가 파악한 2018년 기준 법정 공공서식의 종류는 25만건에 달한다. 그중 국민이 작성해야 하는 신고·신청서식은 8천건 가량이다. 부처는 8천건의 공공서식이 주로 한글 파일로 제공됐다는 점을 짚으며, 이를 편집할 수 있는 무료 프로그램 제공을 상당한 수혜로 선전하고 있다.

윤종인 행정안전부 차관은 "이번 프로그램 보급으로 국민이 종이서식을 작성하는 불편함이 대폭 완화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다양하고 근본적인 서식 개선 및 민원불편 해소방안을 마련하여 국민 생활 속에서 체감 가능한 정부 혁신 성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 근본적인 국민불편 해소방안과는 동떨어져

윤 차관의 기대대로 될 것 같지 않다. 역효과를 일으킬 가능성이 짙다. 잘못 진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해법이기 때문이다.

행정·공공기관에서 작성해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서식의 주요 정보는 결국 다른 어딘가의 기관에 존재한다. 서식에 기반한 행정 상당수는 민원인더러 타 기관의 정보를 받아서 채워 내놓으라는 '심부름'의 성격을 띤다. 국민은 공공 서식을 편집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수많은 공공 서식 자체가 사라지는 행정 혁신을 원한다. 따라서 공공서식 작성·제출을 요구해 온 기존 행정절차의 개선을 근본 과제로 봐야 한다.

그런데 이번 무료 프로그램 제공은 유료 프로그램 사용 부담 문제만을 해결할 수 있다. 수천 건에 달하는 공공 서식을 만들어내 국민들로부터 일일이 그 작성을 강제하는 기존 행정의 틀 자체를 개선하는 것과는 상반된 접근이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정부의 공적 기록의 생산과 보존 활동을 특정 기업의 .hwp 파일 처리 기술에 더 깊게 종속시킬 것이다. 이나마 모든 국민이 수혜자가 될 것이란 보장이 없다.

■ 기술 선택권 문제 여전할 수도

이번 행안부 조치로 예상되는 문제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국민들이 전자문서 형태의 공공서식을 다룰 때 그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이제껏 제한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행안부가 인정하듯 국민에게 작성과 제출을 요구하는 공공서식 상당수가 .hwp 파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hwp 파일을 편집하려면 한컴의 SW에 의존해야 한다. 곧 나올 무료 SW가 모바일 또는 맥OS나 리눅스 등 비주류 데스크톱을 어떻게 얼마나 지원할 거란 보장이 일절 없다.

이처럼 정부가 특정 기업의 SW를 필요로하는 파일 형식을 쓰면, 국민에게 해당 SW뿐 아니라 그걸 돌릴 수 있는 운영체제(OS)나 플랫폼 사용까지 강제하게 된다. 결국 국민의 SW와 플랫폼 사용 선택지를 좁힌다. 국민의 선택권이 특정 기업의 SW 지원 환경에 좌우되는 셈이다.

■ 행정업무의 기술 종속 유지·심화되나

나아가 정부부처나 공공기관이 본연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불필요하게 사기업의 기술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도 심화할 우려가 있다.

행정·공공기관의 한글 문서 편향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한국 거주 국민뿐 아니라 재외국민이나 귀화 한국인 또는 생활과 직무에 따라 한국 공공기관의 문서를 열람해야 하는 외국인에게도 불편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외교부 재외국민등록신청서, 법무부 귀화허가신청서, 고용노동부 외국인 건강보험제도 변경안내문조차 .hwp 파일이다. 무료로 제공될 프로그램이 저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서식을 작성해야 하는 이들의 외국어 및 비윈도 OS 환경까지 고려해 제공될 것인지 의문이다.

■ 특정기업과의 협력, 공정한가

행안부가 .hwp 파일 형식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기 위해 업무협약을 맺은 상대가 한컴이라는 점이 논란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한컴은 .hwp 파일 형식을 만들고 해당 문서 편집용 프로그램 시장을 독점해 왔다. 지난 2010년부터 파일 형식을 공개하고 2차 저작물을 개발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현재까지 그렇게 개발돼 상용화에 성공한 타사나 개인 개발자의 문서편집 프로그램이 없다. 다만 자체 기술로 PC와 모바일 환경에서 .hwp 파일 처리 기능을 탑재한 오피스SW 개발업체들이 한컴과 경쟁하고 있다.

국민들이 무료 편집 프로그램을 활용함으로써 .hwp 파일을 지속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컴의 SW 기술에 종속된 생태계를 공고히 해준다는 점에서 잠재적 이익이 된다. 행안부가 한컴과 업무협약을 맺어 앞으로도 .hwp 파일 처리 기술을 특정 기업에 의존하기로 한 점을 두고 정부가 오피스SW 시장에서 민간 기업간의 공정한 경쟁을 앞장서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한다면 뭐라 답할 것인가.

■ 2년전 국제표준 채택 취지 무색

행안부의 이번 결정은 2년 전 김부겸 전 장관 재직 당시 부처가 추진한 국제표준 문서포맷 도입 정책 취지와도 어긋난다. 행안부는 지난 2017년 10월 일부 중앙정부부처에서 기존 '.hwp' 형식 파일 대신 '.odt'라는 국제표준 워드파일로 공문서를 생산, 보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클라우드 기반의 전자결재 '온나라2.0' 시스템 도입과 맞물리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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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SW로 .hwp 형식 공문서를 작성해 온라인 기안 절차를 밟는 기존 방식 대신, 다양한 OS와 브라우저로 쓸 수 있는 웹기반의 온라인 문서편집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odt 또는 널리 통용되는 PDF 문서를 생산하고 보존한다는 취지였다. odt 파일은 오픈소스 프로젝트 기반 워드 프로그램으로 읽고 고칠 수 있는 문서 포맷으로 한컴을 포함한 여러 오피스SW 개발업체가 이를 지원하고 있다.

행안부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공적 기록 생산, 보존 활동이 .hwp 파일같은 일부 상용SW에 종속된 수단으로 유지되는 건 부당하다는 비판을 수용해 국제표준 워드파일을 활용키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부처는 당시 결정에 따라 정부가 특정 SW 업체 종속 문제를 줄이고 공공기록 보존성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지금의 행안부에게도 같은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