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이제는 경제야"

[박승정칼럼] 문재인 지지의 역설

중기/벤처입력 :2018/06/05 11:09    수정: 2018/11/16 11:35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진보하는 것일까. 흔한 말이지만 전자는 20세기 사상가들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논할 때 던졌던 화두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은 분명 불완전한 인간 본성의 반영일 테다. 반면 후자는 인간 능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의미한다. E.H 카가 얘기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류의 언급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최고의 날을 보내고 있다. 측근들의 잇단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고공행진 중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법을 아는데다 남북문제라는 정치의 새 역사를 쓰는데 따른 지지세의 유입이 컸다. 집권 후 1년여가 지나면서도 70~80%대의 지지율을 기록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다.

그런데 지디넷이 창간 18주년을 맞아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부의 정책을 불신한다는 응답이 80% 이상이었다. 경기가 좋아지리라고 응답한 사람은 30%에도 못 미쳤다. 산업경제 부문의 인사에도 불만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통령을 신뢰하고 여당을 지지하지만 정부의 정책에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북대화, 북미 정상회담, 지방선거로 이어지는 세기의 정치 일정은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다. 그동안 사회 전반에 쌓인 부조리와 우민화의 굴레는 외려 역사의 진보를 바라는 국민 다수의 무조건적인 지원군에 다름 아니다.

지방선거도 완승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왠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현 정국은 탄핵시도에 이은 열린우리당의 압승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민심은 조석변개(朝夕變改)의 속성을 갖고 있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에 맞닥뜨리면 장마철 날씨만큼이나 변덕을 부린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기가 좋은 예다. 집권 말기, 모든 안 좋은 것은 ‘놈현 탓’이었다. 인재(人災)는 물론 우연한 사고가 터져도 비난은 위정자에게 향했고,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놈현’ 때문이었다. ‘나쁜’ 모든 현상은 ‘놈현 탓’이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 지방선거 압승 예고 속 민생 화두 부상... 중기·자영업·지역산단 위기 '경고음'

사는 것이 고단한 이유였다. 당시 총선에서 여당은 완승했는데도, 정치개혁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쳤고 경제 상황은 침체기를 넘어 최악으로 치달았다. 체감 경기가 그랬다는 얘기다. 당시 정량적 경제지표는 역대 정부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정치공세의 여파도 물론 컸다.

경기 침체기에는 자영업자, 노동자, 청년과 노인 등 힘없고 소외된 계층이 정권에 먼저 등을 돌리는 법이다. 불황일수록 서민들이 먹고 살기가 더 팍팍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직종은 더욱 고단해 진다. 있는 자보다 없는 자에게 직격탄이 되는 이유다.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다를까. 이미 개헌과 정치개혁은 물 건너갔다. 당장 지방선거가 끝나면 민생이 화두로 떠오를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반도체를 제외한 조선, 자동차 등 주력산업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TV 등의 하향 곡선은 위기의 경고음과 다를 바 없다. 대다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종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산업공단이 비어가고 있는 지방은 더욱 어렵다.

현실은 여간 녹록한 게 아니다. 문제는 우리 경제의 일부 산업 의존성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반도체 얘기다. 4차 산업혁명기의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로봇, 빅데이터, 블록체인, 스마트폰 등이 반도체 특수를 견인하고는 있으나 다른 산업의 취약점과 부족한 일자리 문제 등을 가리고 있다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9%에 달했다. 2017년 11월에는 16.8%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수출 증가의 품목별 기여도에서 반도체 비중은 42.9%에 달할 정도로 막중했다. 주력 품목, 특정기업에 대한 의존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력이 있다는 방증이다. 반면 위기의 순간에는 재앙적이다.

이미 ICT 10대 기술 가운데 절반인 5개 분야는 중국과 동급이라는 정부 산하기관 조사 결과도 나왔다. 아예 이동통신, 네트워크, 전파위성, 기반 SW컴퓨팅, ICT 디바이스 등에서는 중국이 앞섰다. 인터넷뱅킹, 드론,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등은 중국을 따라가기에 바쁘다. 중국은 지금 ‘패스트팔로’ 전략과 ‘퍼스트무버’ 전략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중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이대로 가면 서민의 삶은 더 팍팍할 수밖에 없다. 지방선거 이후 총선 고지를 향한 정치권과 언론의 격화된 네 탓 공방은 예견된 수순이다. 민심의 화살은 오로지 정부여당을 겨냥할 것이 분명하다. 정치 이벤트의 유효기간은 끝나가고 악화된 경제 상황은 민심을 호도할 것이다. 고단한 민초의 불만은 마침내 대통령을 향한다.

가상현실이 더 현실 같은 요즘이다. 체감 경기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진보진영의 도덕성은 자기합리화로 덧칠한 수준이다. 네 탓 공방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최근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지원센터에서 ‘4차산업혁명 CEO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 대통령·여당 지지하지만 정책 불신 딜레마는 현실... 코드 인사 지양하고 산업·경제 직접 챙겨야

어찌해야 할까. ‘놈현 탓’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럴 때일수록 무엇보다 권력 주변 정리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우선, 권력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는 측근들이나 가신들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고 했던가.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한 측근에게는 더욱 단호해야 한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도 당연한 수순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축객서(諫逐客書)의 실천이다. 필요하다면 여야를 가리지 말고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한다. 군왕의 가장 큰 능력은 인재를 볼 줄 알고 능히 쓸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출신을 헤아리지 말고 국적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오로지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인재인가가 중요한 조건이어야 한다.

진용을 새로 짜고 미완의 정부 거버넌스도 다시 손봐야 한다. 집권 1년이 지난 이제는 한 자리 하겠다는 정치인보다는 폭넓은 식견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를 폭넓게 등용할 때다. 외교·국방이 아니라면 산업과 경제를 책임지는 부처는 오로지 간축객서의 심정으로 인재를 초빙하라는 얘기다.

그러나 작금의 인사 행태나 청와대에 포진한 인사 면면을 보면 기대난망이다. 대통령 주변에 산업이나 경제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전략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석 자리 하나 없다. 오로지 진영, 코드인사다. 그만큼 대통령이 인사에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정부의 정책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다. 4차 산업혁명을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4차산업혁명위원회까지 발족시켰지만 그뿐이다. 과기정통부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혁신성장의 주도부처라지만 부처 내에서도 존재감이 없다. 중소벤처부·산업부도 마찬가지다. 모두 청와대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청와대는 포용성장이란 화두에 갇혀 4차 산업혁명이란 혁신성장의 가치창출은 말 뿐이다. 블록체인 정책을 보라. 오히려 4차 산업혁명의 신성장 논리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순기능적 논리보다 일자리를 갉아먹는다는 기득권적 난기류에 밀린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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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과거의 잘못을 반추하고 시정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촉구하는 수사다. 역사는 진보해야 한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단 소리보다 쓴 소리에 귀를 더 열어야 하는 이유다. 시간이 많지 않다. 산업과 경제를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놈현 탓’의 역사는 되풀이 되고 만다.

<편집인/과학기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