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X을 통해 생각해본 '혁신의 의미'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상향 평준화된 스마트폰

데스크 칼럼입력 :2017/09/13 11:24    수정: 2017/09/13 13:0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만화가 이현세 씨의 ’공포의 외인구단’은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특히 만화에 등장하는 ‘필살수비’는 작가다운 상상력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수비하는 쪽이 의도한 곳으로 정확하게 공이 날아간다는 발상. 1982년 프로야구 수준에선 상상도 하기 힘든 기막힌 혁신이었다.

하지만 2017년 프로야구에선 ‘필살수비’에 버금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접한다. 2루수가 우익수 앞에 가서 수비를 한다. 3루수는 유격수, 유격수는 2루 베이스 쪽으로 옮겨 수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타자가 친 공은 신기하게도 수비수가 서 있는 자리로 날아간다.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한 '수비 시프트' 덕분이다. 이현세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혁신이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셈이다.

홈 버튼이 없는 아이폰X의 하단 모습 (사진=씨넷)

■ A11 칩 탑재…스마트폰에서 머신러닝도 가능

애플이 12일(현지시간) 소문으로만 떠돌던 아이폰X을 공개했다. 겉보기에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얼굴인식기능인 페이스ID를 탑재했단 점이다. 덕분에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잠금 해제가 된다.

베젤을 없앤 화면과 OLED를 새롭게 탑재한 점 역시 많은 관심을 끌었다. 많은 외신들이 “사상 최고 아이폰”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정도였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도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아이폰에도 인공지능(AI) 칩이 탑재됐다는 점이다. 애플은 이날 아이폰X에 A11 ‘바이오닉 뉴럴 칩’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필 쉴러 애플 부사장이 아이폰X의 페이스ID 기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진=애플 방송 캡처)

덕분에 아이폰X는 머신러닝을 비롯한 각종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애플이 얼굴인식 기능을 자신 있게 아이폰X 잠금해제 수단으로 적용한 것 역시 A11 칩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동안 얼굴인식 기능은 ‘인증 오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애플이 새롭게 선보인 아이폰X는 나름 혁신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발표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특별하단 건데?”란 반문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스마트폰 시장의 수준과 저변이 엄청나게 향상됐기 때문이다. 애플이 이번에 아이폰X의 신기능으로 소개한 것들 중 시장에서 최초로 적용된 건 없다. 페이스ID를 비롯해 OLED, 베젤 없는 디스플레이 등은 이미 갤럭시를 비롯한 많은 안드로이드 폰들에서 최소 한 차례 이상 소개된 것들이다.

■ 4할 타자가 사라진 건 혁신 실종이 아니라 수준향상 때문

시간을 10년 전으로 한번 돌려보자. 스티브 잡스가 처음 터치스크린 방식의 가상 키보드를 선보였을 때 많은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리적인 키보드가 사라지면서 스마트폰이 ‘통화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 소비 플랫폼’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각종 앱을 통해 기능을 추가한다는 발상 역시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스마트폰 시장의 수준은 몰라보게 향상됐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현세 작가가 만화 속에서 구현했던 ‘필살수비’를 경기에서 일상적으로 적용하는 수준까지 업그레이드됐다.

2007년 맥월드 행사에서 아이폰 첫 모델을 소개하던 스티브 잡스. 그 무렵 유행하던 키보드 장착형 스마트폰을 조롱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캡처)

다시 야구 얘기로 살짝 돌아가보자. 프로야구계의 오랜 화두 중 하나는 “왜 4할 타자가 사라졌을까?”란 의문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1982년 백인천 이후로 4할 타자 명맥이 끊겼다. 미국 프로야구 역시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엔 4할 타자를 볼 수가 없다.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타자들의 수준이 낮아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진화 생물학자인 스티븐 굴드는 오히려 ‘타자들의 수준 향상’ 때문이란 답을 내놨다. 그 유명한 ‘굴드의 가설’이다.

무슨 얘기인가? 선수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거인처럼 우뚝 솟은 타자’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됐단 얘기다.

■ 아이폰X vs 갤노트8의 '멋진 도토리 키재기'를 기대하며

스마트폰 시장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깜짝 놀랄 혁신’은 기대하기 힘들다. 삼성, 애플 같은 업체들이 스티브 잡스 당시보다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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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사이에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되면서 ‘경쟁자를 압도하는 제품’을 내놓는 건 갈수록 힘들게 됐다. 어떤 성능을 갖다 붙이더라도, ‘점진적인 진화’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게 됐단 얘기다.

애플이 12일 선보인 아이폰X 역시 마찬가지다. ‘10주년 기념폰’으로 공을 들였지만, 시장에선 갤럭시노트8을 비롯한 경쟁 제품들과 ‘도토리 키재기’를 해야 하는 수준일 따름이다. 다만 그 도토리들이 ‘10년 전의 거인’보다 훨씬 더 수준이 향상됐다는 점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일 테지만.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