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개발자모임터 10주년을 축하한다

[임백준 칼럼] 수많은 여성 직장인이 뒤를 이어가기를

전문가 칼럼입력 :2017/06/26 11:27    수정: 2017/06/26 11:28

임백준 baekjun.lim@gmail.com

지난 6월 10일 역삼동 디캠프에서 여자개발자모임터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나는 미국에 있어서 참가하지 못했지만 모임의 주역인 여자개발자들과 다수의 남자개발자들이 참가해서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2007년 소박한 네이버 카페로 출발해서 현재 6천여명에 이르는 많은 회원을 보유한 모임으로 성장한 여자개발자모임터는 우리나라 IT 업계와 여성운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자개발자모임터는 여자개발자들이 모여 서로의 고충을 나누며 위안을 주고받는 동호회에 가깝다. 이러한 모임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IT 업계에서 여성은 극도로 소수이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이라는 지표에서 아직 갈길이 먼 우리 나라의 일반성에 여성이 소수라는 IT 업계의 특수성이 결합되어 IT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남모르는 이중고를 겪는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어려움과 서러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고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위안이 될 것이다.

여성개발자에 대한 차별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기술적인 내용을 다루는 밋업모임이나 컨퍼런스에 가면 여성의 비율이 5%가 되지 않는다. 기형적인 수적 비율 때문에 여성은 어떤 의미로든 처음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 그에 비해서 마케팅이나 미디어를 다루는 모임에 가보면 여성이 더 많거나 적어도 절반이다. 그래서 미국여성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는 차별의 정도는 한국에 비해서 덜하지만, IT 업계로 시야를 좁히면 차이가 없다. 우버에서 내부 여성직원을 대상으로 저지른 성폭력을 생각해보라. 미국이 오히려 한국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정도다. IT와 직접 관련있는 것은 아니지만 월스트리트 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나는 사내에서 권력을 쥔 남성이 여직원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희롱하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다.

출산휴가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운 여성직원을 향해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 적도 있고, 입밖에 내어 말은 못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바로 소송이다) 남성직원을 노골적으로 편애하는 중역을 본 적도 있다. 특히 코딩을 잘하는 긱(geek)은 남자라는 편견이 많아서 여성은 주로 기획, QA, 데이터분석과 같이 조금이라도 '덜' 기술적인 분야에서 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부러 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그렇게 마음을 먹는다. 여성이 코딩을 잘하거나 기술적인 수준이 높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신기하게 여기는 풍토도 있다. 알렉스 친(Alex Qin)이라는 여성개발자는 2017년 런던에서 열린 큐콘(QCon) 컨퍼런스에서 그런 풍토에 저항하기 위해 삭발을 감행한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사실 컴퓨터과학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여성개발자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존 푸에기(John Fuegi) 교수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을 통틀어 인류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19세기에 찰스 배비지와 함께 연구를 수행했던 여성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였다. 코볼의 어머니 혹은 컴퓨터의 오동작을 처음으로 버그라고 명명한 것으로 알려진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도 유명하다. 객체지향을 공부하다보면 솔리드(SOLID) 원리라는걸 접하게 된다. 다섯 개의 글자가 저마다 중요한 원리를 가리키고 있는데 한가운데에 있는 L은 리스코프 치환원리(Liskov substitution principle)를 뜻한다. 이 원리의 주인공인 바버라 리스코프(Barbara Liskov) 역시 여성이다.

요즘 사람중에서는 제시카 커(Jessica Kerr)가 떠오른다. 아토미스트(Atomist)라는 회사에서 개발자로 근무하는 제시카 커가 요즘 미국의 기술 컨퍼런스에서는 단골 강연자다.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서 많은 개발자들이 그녀의 강연을 좋아한다. 이 글을 쓰다가 그녀의 링크드인 프로파일을 보니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다.

"개발자, 컨퍼런스 스피커, 저자. 배우고, 코딩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폭넓은 지식을 탐구하고 그렇게 배운 것을 공유하는 재능과 궤를 같이 하는 17년의 개발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백하건데 나 또한 유투브에서 안드로이드, 자바스크립트, 함수형 프로그래밍, 엘릭서(Elixir), 엘음(Elm) 등 수많은 주제를 넘나드는 제시카 커의 강연을 찾아서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전달하는 기술도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그녀의 열정에 감염되고 싶어서였다.

주목할 만 한 여성개발자는 우리나라에도 많다. 여자개발자모임터의 운영자인 전수현개발자, 나와 함께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했으며 외부강연의 횟수가 차츰 많아지고 있는 서지연개발자, 그녀의 매니저이자 동료인 김계옥개발자, 내가 SK C&C에서 강연할 때 반짝거리는 인상을 남겨주었던 김경진개발자, 스스로 개발자는 아니지만 개발자문화를 누구보다 열심히 고민하고 사랑하는 삼성 SDS의 황은기님, 장고걸스를 운영했던 이수진개발자, 스위처라는 스타트업 회사의 CTO인 박미정개발자, 멀리 영국에서 활약중인 양파님, 우리나라의 자랑인 오픈소스 제플린에서 근무하는 류아영개발자, 지면관계상 다 언급할 수는 없으나 그밖에도 많은 여성개발자가 우리나라의 IT 업계를 환하게 이끌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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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수많은 여학생, 새내기 직장인들이 열심히 꿈을 키우고 공부를 해서 뒤를 이어가기를 희망한다. 그리하여 여자개발자모임터의 20주년을 축하하는 날, 우리는 더 이상 소수자로서의 여자개발자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성장과 발전을 주도하는 중견 커뮤니티로서의 여자개발자모임터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10주년 행사를 마치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여자개발자들은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냉혹한 현실 때문에 한숨을 쉬었을 지 모른다. 축하와 현실은 별개의 문제니까.

그래서 그대들이 대단한 것이다. 일상의 삶을 살아내 주는 것만으로 한국사회의 진보에 힘을 보태는 존재들. 그대들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에 찍는 글자 하나하나, 코드 한줄한줄이 그대로 뜨거운 혁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자개발자모임터의 유쾌한 분위기와 열정이 우리나라 IT 업계의 그늘에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멀리멀리 전파되기를 바라며 10주년 생일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