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가상 개발자 모임 시작하자

전문가 칼럼입력 :2015/02/02 11:53

임백준
임백준

얼마 전 미국 동부에서는 눈 폭풍 주노 때문에 난리가 났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오후 2시에 조기 퇴근할 때까지 데이터센터의 다운에 대비한 대책을 수립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고, 다음 날인 화요일에는 회사 사람들 전원이 재택근무를 했다. 다행히 주노는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갔다.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던 화요일 아침에 팀원들과 화상채팅을 이용해서 회의를 가졌는데, 한두 명이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팀원 전체가 각자의 집에서 회의에 참석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구글 행아웃을 이용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실제로 사무실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비교해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각자의 화면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 자기 방에서 대화에 참여하기 때문에 대화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편안한 느낌도 들었다. 프로젝트의 일부를 불가리아에 있는 개발자들에게 외주를 주고 있는데 그들이 작성한 코드를 검토할 때도 스카이프나 행아웃을 이용해서 실시간 화상채팅을 진행한다. 직접 만나서 코드리뷰를 수행하는 것에 비해서 차이를 느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자바 커뮤니티는 전통적으로 각 도시나 지역에서 형성되는 오프라인 모임인 자바사용자그룹(JUG)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왔는데, 2013년 11월부터 시작된 vJUG(가상 자바사용자그룹)은 구글 행아웃, 유튜브, IRC 채널 등을 이용해서 전 세계의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유익한 모임을 개최하고 있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본방’을 사수하면서 라이브의 긴장감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vJUG의 내용이 갈수록 알차게 채워지는 느낌이다.

얼마 전인 작년 12월에 있었던 핵서밋(hack.summit)의 경우도 역시 구글 행아웃과 같은 화상채팅 기능을 활용해서 전 세계 개발자들을 상대로 열린 성대한 컨퍼런스였다.

비트 토런트의 창시자 브람 코헨, 구글 글래스를 만든 톰 치, 스택오버플로우에서 최고의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는 존 스키트, 설명이 필요 없는 와드 커닝험, 켄트 벡, 길라드 브라샤, 깃헙의 CTO 스캇 차콘, UML의 창시자 그레디 부흐, 아파치 스파크의 창시자 마테이 자하리아 등 거물급 스피커들과 64,790명의 개발자가 참석한 사상 최대 규모의 컨퍼런스였다.

 나는 회사 시간을 쪼개서 많은 강연을 라이브로 시청했고, 일부는 유튜브에서 ‘재방’으로 감상했다. 이런 업계의 리더들이 편안하게 자기 집 책상에 앉아서 옆에 앉은 친구에게 말하듯 자연스럽게 들려주는 값진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의 동료가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작년에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데이즈 행사에서 강연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몇 개의 강연 요청이 있었다. 주로 정부기관과 대학이었는데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이 내가 미국에서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화상채팅으로 진행하는 강연을 제안했는데, 행사의 취지가 아직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을 수용하는 단계는 아니라는 설명을 듣고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도 화상채팅 기술을 이용한 가상 컨퍼런스가 없지는 않겠지만 얼마나 성공적인 수준으로 진행되는지는 모르겠다. 필요한 기술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이 채워지면 우리나라의 개발자들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사가 특정 회사의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개발자들이 스스로 모여서 만들어나가는 자발적 커뮤니티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친분을 맺은 ‘페친’들과 함께 소규모 가상 모임을 계획했다. 2월 중순에 (서로 직접 만난 적이 없는)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화상채팅으로 만나서 아카 라이브러리와 관련된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에 있지만 나를 포함하여 일부는 미국에 있고, 한 사람은 도쿄에, 또 한 사람은 싱가포르에 있다. 모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대화 내용을 녹화해서 공유할 생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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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는 국내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hack.summit같은 컨퍼런스가 개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은 vJUG의 한국어 버전도 좋다. 누가 시작하든 상관없다. 언어나 플랫폼, 회사, 직책, 나이에 상관없이 프로그래밍에 열정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서 성대한 가상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의견을 교류하고, 관심을 공유하여 국내 개발자들의 문화가 윤택해졌으면 하는 희망이다. 그런 컨퍼런스가 시작되면 국내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훌륭한 개발자들도 참여해서 정보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가상 모임이 이미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중인데, 나만 모르고 뒷북을 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를 제발 그런 모임에 초대해 주시길. 그게 아니라면 우리도 당장 가상의 모임을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화다. 문화는 흙이고 기술은 꽃이다. 기술은 문화라는 흙을 먹고 자라는 꽃이다. 개발자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가상의 모임은 꽃을 피우기 위한 문화라는 흙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백준 IT컬럼니스트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 모건스탠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맨해튼에 있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분산처리,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관계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