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힘으로 생각하라, 가차없이 질문하라

전문가 칼럼입력 :2014/11/13 07:30    수정: 2014/11/14 08:44

임백준
임백준

IT와 인문학의 융합이 거론된 지 몇 년이 지났다. 불현듯 인문학이 강조되기 시작했을 때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인문학 전공자를 대거 채용한다는 뉴스가 있었고, 프로그래머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고, 대학에서는 아예 학과나 연구소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러한 열기가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걱정도 된다. 저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상품에 입히는 '인문학적 감수성'으로서의 인문학이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의 감수성은 대단했지만, 디자인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애정은 인문학이라는 바다 전체에 비하면 작은 개울에 불과하다. IT와 인문학의 융합을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애플의 성공담이나 삼성이 말하는 통섭형 인재가 인문학이라는 깊은 바다를 얕은 개울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인문학은 (디자인이 멋진 스마트폰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본령은 모든 것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 성역 없는 상상,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리고 실천에 놓여있다.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본질은 해커 정신에도 맞닿아 있다. 어린 꼬마들의 치기어린 크래킹이나 동유럽 마피아들의 음험한 범죄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정의로운 해커들의 자유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은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권위를 당위로 착각하지도 않는다. 핵심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데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거꾸로 뒤집어 보고, 귀에 들리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 본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영방송 뉴스가 보여주는 내용은 인문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인문정신이 충만한 사람은 스스로 비판의 날이 서있는 만큼, (근거가 분명한) 타인의 비판을 환영한다. 의심하고, 도전하고,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주목한다. 그런 후배가 있으면 그의 인문정신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배려한다. 합리적이다. 그에 비해서 인문정신이 결여된 사람은 의심하지 않기에 시야가 좁고, 고분고분하고, 상상력이 부족하고, 주눅이 들어있다. 심지어 비굴하다. 타인의 비판에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낸다. 그런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숙명여대 컴퓨터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 나는 토마스 만을 읽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왜 토마스 만이냐면, 공지영 작가가 인터뷰에서 '토니오 크뢰거'가 최고의 연애소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읽었기 때문이고, 내가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친구가 맨해튼에서 옆구리에 끼고 걷던 책의 제목이 '베니스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내 프로그래밍 실력이 그 친구의 반만 될 수 있어도 나는 메피스토에게 기꺼이 내 영혼을 맡길 것이다.)

토마스 만을 읽은 사람은 없었다. 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싱그러운 여대생들의 눈빛은 그게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물론 토마스 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읽는 흥미롭고 진지한 작가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질문하는 학생이 너무나 소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라면 마이크로소프트 테크데이즈 행사에서 C# 강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어떤 질문을 했을 때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썰렁한 순간을 빼놓을 수 없다. (등 뒤로 식은땀이 또르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문정신과 거리가 먼 우리의 교육과정과 직장문화는 사람들이 질문에 대해서 갖는 태도를 이렇게 기묘하게 우그러뜨려 놓았다. 질문을 구성하는 힘은 인문정신의 핵심이다. 질문을 하기도 잘 해야 하고, 받기도 잘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인문정신이 탈색되어 사라진 무념무상의 순한 존재로 훈련되어 왔다.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1) 자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는 기회, 혹은 (2) 상대방의 질문을 내 생각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정답 혹은 오답이라는 개념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받으면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한다.

오답을 말하는 것이 질문한 사람에 대한 무례라고까지 생각한다. 내가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하다. 라캉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 루카치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욕망의 전이를 물화(物化, reif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reification은 뜻은 다르지만 컴퓨터 과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정리해보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대부분은 인문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도 심각하게. 우리는 의심할 줄 모르고, 질문할 줄 모르며, 욕망 앞에서 솔직해질 줄 모른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작게는 코딩할 때 그렇고, 크게는 인생이 그렇다. 비교를 하자면 오늘날의 20대에게 인문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는 20년 전의 청년들보다 정도가 심하다. 이런 현실에서 IT와 인문학의 융합을 말하고, 통섭형 인재를 찾는 것은 잔인한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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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IT와 ‘융합’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복원이 되어야 한다. 인문정신이 오롯이 키워지는 교육과정과 직장문화가 뿌리를 내리면, 융합과 통섭에 대한 주문이 없어도 IT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스티브 잡스와 마크 주커버크가 속속 등장하고, 그들은 어린 학생들이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즐거워할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사회가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해 본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그대,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가차 없이 질문하라. 그것이 인문학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백준 IT컬럼니스트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 모건스탠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맨해튼에 있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분산처리,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관계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