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이태닉호와 영웅의 탄생
1912년 4월 14일 오후 10시 25분.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바다에서 거대한 유람선 타이태닉호가 빙산과 부딪쳤다. 잉글랜드 남부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으로 처녀항해에 나선 5만2,000톤짜리 세계최대 초호화 여객선이었다. 길이 269m, 높이가 건물 20층 규모인 절대 침몰하지 않는다는 최신 기술로 건조된 선박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최대의 첨단 유람선이 가라앉고 있었다.
빙산에 부딪친 것을 확인한 스미스 선장은 곧장 무선실로 와 마르코니 통신원 필립스에게 구조신호를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는 오랫동안 공식적인 국제조난신호로 확립돼 온 ‘SOS’가 아닌 “CQD(Seek You Disaster)”라는 신호를 보냈다.
타이태닉에서 500km 떨어진 곳을 운항하고 있던 카르파티아호 무선실에 있던 같은 마르코니통신사 소속 친구인 코탐 수신사가 타이태닉호의 조난 신호를 받았다.
“즉시 오라, 우리는 가라앉고 있다.”
그는 응답했다.
“무슨 일이야? 내가 선장에게 말해야 되나?”
필립스의 대답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래, 이 친구야. 이건 조난 신호야.우리는 빙산에 부딪쳐 가라앉고 있어.”
필립스는 타이태닉호의 위도와 경도를 가르쳐 주었다.카르파티아호의 헨리 로스트론 선장은 이튿날 새벽 0시 35분 선실에서 잠이 깼을 때 즉시 타이태닉호를 향해 달려 갔다.
타이태닉호의 무선사인 필립스와 브라이드는 모든 배의 전력이 꺼질 때까지 계속해서 구조신호를 보낸 다음에야 갑판을 향해 돌진했다. 오전 2시17분 타이태닉호는 막 침몰하려 했다. 브라이드가 맨처음 뛰어올랐고 뒤집혀진 구명보트에 가까스로 매달렸다.
오전 2시45분 카르파티아호에서 망을 보던 사람들은 멀리서 초록빛으로 보이는 신호를 보았고 그 쪽을 향해 다가갔다. 오전 4시무렵 동이 틀 때가 되어서야 카르파티아호는 또다른 초록 불빛을 발견했고 첫 번째 발견된 생존자들의 보트가 100미터 밖에 안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700명의 생존자를 구한 카르파티아 호에는 이제 브라이드와 코탐 두사람이 생존자의 명단과 재난관련 무선통신을 보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필립스무선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막 잠이 들려다가 맨처음 타이태닉호의 구조신호 ‘CQD’를 받고 깜짝 놀라 갑판으로 뛰어 나갔던 카르파티아호의 무선수신사 코탐은 그로부터 8시간30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모스부호기를 잡고 있었다. 그는 기진 맥진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사고 당시 우연하게도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 워너메이커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무선통신회사 마르코니아메리카 본부에 앉아 있던 21세 청년이 이 통신을 감지했다. 그는 직원 2명과 함께 대서양의 폭풍우와 수신잡음을 뚫고 짤깍거리여 쏟아지는 무선신호를 정신없이 읽어 내렸다.
그는 마르코니무선전신아메리카(Marconi Wireless Telegraph Company of America)의 부 기사장으로 일하던 데이비드 사노프라는 청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브로드웨이 워너메이커 백화점꼭대기 층에서 헤드폰을 쓴 소년들이 생존자와 사상자 명단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절망감에 빠진 뉴욕 최상류층인 애스터 일가가 마르코니 본부를 찾아와 명단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했다. 청년은 이들에게 명단을 알려주었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세운 신문‘아메리칸’은 몇 일동안 혼돈 속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타이태닉 생존자 명단을 수신한 사노프와 직원들을 칭송하는 기사를 냈다.
‘직원들은 난파를 염려하면서 각자 혼신의 에너지를 끌어 모아 밤새 자리를 뜨지 않고 수십건의 메시지를 발송하고 수신했다.’
이렇게 해서 타이태닉호의 조난과 무선통신은 데이비드 사노프라는 무선통신 영웅의 전설을 탄생시켰다.
2■라디오산업의 꿈
이듬 해인 1913년 1월. 데이비드 사노프는 에드윈 하워드 암스트롱과 함께 저지 해안을 지나 벨마 해변에 있는 무너질 듯한 헛간에서 새로운 수신장치를 설치해 시험하는 데 성공했다.
수신기에 스피커를 연결하자 소리는 보다 뚜렷해졌고 음원은 더욱 멀리까지 확장됐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와 포틀랜드를 오가는 대화소리와 이제 곧 호놀룰루를 강타할 뇌우를 동반한 폭풍우에 관한 날씨 예보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사노프는 여기서 한걸음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무선 수신기가 짤깍거리는 소리를 포착할 수 있다면 음악을 듣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는 브로드웨이의 워너메이커백화점 건물 꼭대기층에서 턴테이블 위에 레코드판을 올려놓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워너메이커 백화점의 마르코니아메리카 교환수에게 주파수를 맞추도록 지시했다.
놀랍게도 필라델피아의 교환수는 모스부호가 아닌 악기의 선율이 흐르는 교향곡을 들을 수 있었다.
1910년대 미국 대다수의 가정의 여흥을 즐기는 방법은 에디슨축음기를 재생하거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라이브 콘서트,극장,무도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이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1913년 데이비드 사노프가 뉴욕 워너메이커 백화점 꼭대기에서 이 단순한 실험에 성공하자 그의 방향도 분명해졌다. 그는 무선사들만이 들을 수 있는 암호풀이 모스부호 통신이 아닌 일반가정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을 꿈꾸게 됐다.
1916년 25세 청년 데이비드 사노프는 마르코니 아메리카 지배인에게 한 장의 메모를 보냈다. ‘라디오뮤직박스’로 불리는 최신 진공관 무선통신 수신기를 각 가정에 도입시키자는 내용의 구상이었다.
사노프는 이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도 같은 내용의 음악과 스포츠 중계 등을 즐길 수 있는 시대를 꿈꾸고 있었다. 기계식 에디슨 전축밖에 없었던 가정용 전자기기 시장에 라디오수신기라는 전혀 새로운 시장이 개화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신문잡지에만 의존하던 광고시장 저변 확대 가능성까지 읽어내고 있었다.
그의 메모는 라디오산업과 방송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한 것으로서, 이대로라면 커뮤니케이션 산업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내게는 라디오를 피아노나 축음기와 다르지 않은 수준의 가정생활용품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다. 무선을 이용해 음악을 가정으로 옮겨놓는 것이다....음악전송의 문제는 이미 원칙적인 해결이 이뤄졌고 따라서 전송파장에 맞춰진 수신기는 모두 전송된 음악을 수신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수신기는 단순한 ‘라디오뮤직박스(Radio Music Box)’형태로 설계돼 서로 다른 몇 개의 파장으로 준비될 수 있으며 그러한 파장들은 스위치를 올리거나 버튼을 누르면 변형시킬 수 있다. ‘뮤직박스’는 음성증폭진공관과 확성 전화기로 보완될 수 있으며 모두 라디오박스에 깔끔하게 탑재된다. 라디오박스는 응접실이나 거실 테이블에 놓일 수 있으며 스위치세트도 함께 붙어 있어서 전송받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반경 40~80km 내로 보내지는 음악은 아무런 문제없이 완벽하게 청취할 수 있다. 해당 반경내에 거주하는 수십만의 가정은 동일한 송신기로부터 동시에 청취할 수 있으므로 충분히 음량신호를 확보해 기분좋게 들을 수 있다. 송신기 출력은 필요한 경우 5kW로 생성돼 반경 40~80km에 두루 미치면서 각 가정에 엄청난 음량의 신호를 전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헤드폰 사용은 불필요하며 개별 라디오 뮤직박스에 딸려있는 작은 루프안테나의 개발도 안테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원리는 다른 수많은 영역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가정에서 연설을 청취하는 일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중요한 국가 행사들도 그때 그때 라디오를 통해 발표돼 전파될 수 있다. 야구경기 점수도, 폴로 그라운드 경기장에 설치된 장비를 통해 공중파로 전달될 수 있다. 이같은 원리는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계획은 누구보다 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서 생활하는 농부를 비롯한 시민들에게 흥미로울 수 있다. ‘라디오뮤직박스’를 구매할 경우 그들도 인근도시의 해당반경에 전송되는 콘서트와 연설 및 음악과 리사이틀 등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가장 일반적인 몇가지 라디오 사용영역을 열거했지만 이외에도 동일원칙이 확장될 수 있을 만한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안테나를 포함한 라디오 뮤직박스를 대량 생산할 겨우 라디오 한 대당 75달러라는 적정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 10만대 규모로 대량 생산되는 라디오를 75달러씩 판매할 경우 상당한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되는 ‘라디오 뮤직박스’판매가 기업의 주요 수입원이 될 것이다. 송신기 판매와 간행물 ‘와이어리스에이지(Wireless Age)’의 발행부수 및 삽입광고를 늘림으로써 2차 판매원이 생긴다. 기업측면에서는 음악리사이틀이나 연설 등 만반의 프로그램 준비작업에 착수해 만족할 만한 효과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계획이 실제로 개발되어 실행되기 전까지 전체 사업규모를 추정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1천500만 가구 가운데 약 7%, 100만 가구만 라디오를 구입하더라도 7천500만달러라는 엄청난 매출 발생을 의미한다. 이 계획에서 창출되는 수익은 차치하고라도 기업을 광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궁극적으로 기업의 이름이 각 가정에 널리 전파되고 무선 시스템이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정부, RCA 설립하다
1차대전은 무선통신을 성장산업으로 부상시켰다. 마르코니아메리카, GE,웨스팅하우스 등이 전쟁 중 선박,비행기,자동차 통신용 진공관을 생산했다. 이는 무선통신 실용화를 앞당겼고 그 기술적 조정자는 미 해군이 됐다. 특허인정은 전쟁상황이라는 이유로 무시됐다.
1918년 11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라디오방송은 미해군 독점하에 놓이게 됐으며 자연스레 라디오방송 국유화 법안이 미해군과 국무성 주도로 의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정부독점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자 해군은 차선책으로 군수업체 GE와 타협해 자신들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민간 기업 RCA(Radio Corporation ofAmerica)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영국계 마르코니아메리카와 AT&T,UF(United Fruits)등과 같이 무선통신관련 기술을 가진 대기업들이 망라됐다. 중요한 통신관련 기술과 특허를 다른 나라에 주기 싫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1919년 10월 17일 탄생한 RCA는 외형상 민간기업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영기업체 성격이 짙었다. 미국 시민만이 RCA이사가 될 수 있었고 외국인은 20%이상 주식을 소유할 수 없으며 미정부 대표자가 이사진에 포함되어야 했다. GE출신의 오웬 영 초대 RCA회장은 심화되는 특허전쟁으로 라디오 기술개발이 저해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노프대신 협상을 주도하면서 주식과 경영권을 양도하는 대신 많은 특허를 사들였다. 그 결과 1921년 GE가 RCA 주식의 30.1%, 웨스팅하우스가 20.6%, AT&T가 10.3%, 유나이티드푸르트가 4.1%를 각각 보유하게 됐다.
1930년 사노프가 RCA사장이 되자 그는 인가받지 않은 조립업체 라디오 수신은 금하고 RCA 전체의 생산라인을 관리할 수 있는 유통업자에게만 수신기,진공관,부품들을 할당함으로써 RCA의 특허를 강화해 나갔다.
4■목숨건 세기의 권투시합 중계
폭염 속의 1921년 7월 2일. 허드슨강 너머에 있는 저지 시 특설 링에는 9만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콜로라도 매너사 출신인 세계헤비급 챔피언 잭 뎀프시는 ‘매너사의 주먹’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는 2년 전 1회전에서 7번의 강펀치로 2미터 장신의 제스 윌러드를 때러 눕이고 헤비급 챔피언(1919~1926)에 등극한 선수였다.
잭 뎀프시는 로프를 잡고 올라가 9만여명의 팬들에게 험악한 인상을 지어보이며 인사를 했다.
오키드맨(Orchid man)이라는 별명을 가진 뎀프시의 세련된 적수 조르주 카펜티에르(George Carpentier)는 느긋하고도 우아한 몸짓으로 링에 올라섰다. 그는 1차대전에 비행사로 참전했던 프랑스의 전쟁영웅이었다. 세기의 권투시합 1회전 공이 울리자 흥분한 관중들은 링주변으로 몰려 들었고 우리속 표범같은 두 선수는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엉켰다가 서로를 밀쳐냈다.
하지만 이 운명을 건 100만달러짜리 세기의 타이틀매치 당사자보다도 이 시합에 더 크게 운명을 맡긴 사람은 데이비드 사노프였다.
사노프와 몇몇 엔지니어들은 아무런 예산도 없이 임시방송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워싱턴의 해군기지로 싣고 가던 거대한 송신기를 빼돌렸다. 이 장비는 결국 해군기지 대신에 권투시합장 바깥의 한 오두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노프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AT&T는 권투 링과 방송 송신기를 직접 연결해 주는 다이렉트 라인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RCA는 한쪽 전화기에서 인접한 전화기로 링 앞쪽에 있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건너뛰어 연결시켰다. 전선은 기지국이 있는 오두막까지 이어졌다. 이들은 이같은 교묘한 방법으로 음질은 다소 떨어졌지만 권투중계를 마치는 데 성공했다.
라디오청중은 스피커가 설치된 영화관, 클럽 학교강당에 모인 청중을 포함한 약 30만명이 넘었다.
뎀프시와 카펜티에르의 시합은 단순히 최초의 대형 스포츠 방송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극장용 폐쇄회로 방송까지 만들어 냈다. 뉴욕시어터와 루프 가든에는 1천명이 넘는 군중들이 들어찼다.
심지어 뉴저지주 애즈베리파크(Asbury Park) 산책로에서는 한 남자가 골프카트에 수신기를 달아 돈을 받고 자신의 이동의자에서 중계방송을 듣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카펜티에르는 초반부터 거세게 탱크처럼 밀어붙여 대던 뎀프시보다 훨씬 더 민첩했다. 그는 몸을 웅크리다 잽을 날렸다. 2회전이 되자 뎀프시는 상대의 코피를 터뜨렸다. 카펜티에르는 더 많은 잽을 날렸다. 그가 뎀프시를 덮쳤지만 결정타는 없었고 나비처럼 링 주변을 돌아다니는 듯 보였다. 3회전 말 카펜티에르의 힘이 빠진 듯 보였다. 뎀프시는 4회전이 되자 부쩍 힘들어 하는 카펜티에르의 복부를 연달아 가격했다. 뎀프시는 이제 카펜티에르를 따라 잡기 시작했고 그의 강펀치가 카펜티에르를 가격했다. 쓰러진 그는 심판의 카운트 ‘에잇(8)’이 되자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즉시 달려가 펀치를 먹인 뎀프시에게 넉아웃(KO)됐다. 다시 카운트가 시작되고 ‘텐(10)’이라고 외치는 심판의 소리에 뎀프시는 상대선수에게 달려가 그를 일으켜 자리에 부축했다.
시합이 끝난 후 라디오 수신기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RCA의 라디오방송을 통해 들은 뎀프시-카펜티에르 대전 결과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이 해 미국의 라디오수신기를 소유한가정은 미국 전체 가구의 0.2%에 불과했다.
이 세기의 권투시합의 승자는 표면상 뎀프시였다. 하지만 더 큰 승자는 데이비드 사노프였다.
오웬 영 RCA회장이 사노프에게 보낸 전보의 내용은 말 그대로 그에게 RCA제국의 역사를 쓸 최초의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당신은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4회전에서 뎀프시가 KO승을 거두면서 시합이 빨리 끝난 것은 하늘이 사노프에게 내린 행운의 선물이었다. 카펜티에르가 무참히 링 매트에 쓰러지는 순간 중계용송신기가 설치돼 있던 오두막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뉴저지주의 혹독한 7월의 열기가 전기과부하와 겹쳐져 장비를 녹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지체돼 5회전 시합중에 중계가 먹통이 됐더라면 30만 권투팬들은 RCA에 대해 빗발치는 비난을 하면서 실망의 말을 쏟아 냈을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 성공적인 중계방송은 미국에 라디오 열풍을 몰고 오는 기폭제가 됐다.
사노프의 사상 첫 대규모 스포츠(권투)중계는 미국 무선통신산업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미국 전역에서는 방송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된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너나 할 것없이 무선기지국을 구축해 방송을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라디오제조업체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1923년 말 556개의 방송사가 인가됐고 거의 모든 주파수가 할당됐다. 방송사들은 RCA,GE,웨스팅하우스 같은회사 외에 전기기계회사,일반제조회사,신문사,상사및 개인에 의해 설립됐다.
이를 따라 수많은 기업들이 조립하기 쉬운 라디오수신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수요에 대응하는 데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수신기 매출은 1923년 5,030만달러에서 1929년에는 3억6,630만달러로 껑충 뛰어올랐다.
1926년 라디오수신기 시장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많은 기업들이 사라졌다.1923년부터 1929년 사이에 648곳의 라디오수신기 제조업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까지 남은 라디오수신기 선두업체들은 모두가 1920년대 이전에 세워진 기업들이었다. 필코(Philco),앳워트켄트(Atwater Kent),스트롬버그 칼슨, 실베이니아, 마그나복스 등이 모두 전기통신관련기업들이었다. 이전의 경험없이도 살아 남은 업체는 라디오수신기업체 제니스(Zenith),진공관 제조업체 레이시온(Raytheon)뿐이었다.
한편 데이비드 사노프가 1916년 자신의 메모를 통해 7,500만달러어치를 미국민에게 구입하도록 할 수 있다고 한 예언은 거의 현실이 돼 가고 있었다. RCA의 라디오 생산 첫해(1922년) 라디오 매출이 1,100만달러를 훌쩍 넘겼다. 하지만 RCA경쟁자들은 정작 라디오특허를가진 RCA보다도 더많은 매출, 즉 5,000만달러어치나 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제 데이비드 사노프의 차례였다. 그는 이들을 향해 특허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RCA경쟁자들은 송수신기와 진공관 등 다양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쟁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사노프는 제니스와 필코 같은 기업들이 7.5%의 로열티를 RCA에 지불토록 했고 곧 미국 전역에 있는 라디오제조업체의 90%에 적용됐다.
1929년이 되자 RCA 라디오 판매액은 4억달러로 치솟았다.
데이비드 사노프는 30세가 되기 전에 백만장자에 버금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제국의 확장
데이비드 사노프는 RCA 라디오를 더욱더 빠르게 미국인 가정으로 판매해 확산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전축의 대명사인 빅터토킹 머신(Victor Talking Machine)에게 제안했다.
“우리의 라디오를 귀사의 전축에 장착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줄 겁니다.”
니퍼(Nipper)라는 강아지브랜드로 유명한 이 회사는 단숨에 거절했다.
하지만 사노프가 빅터의 경쟁사 브런스윅(Brunswick)으로 달려가 150만달러짜리 계약에 합의하자 빅터 임원들이 즉각 달려 왔다. 데이비드는 결정을 재고해 달라는 빅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도처에 라디오와 전축이 결합된 제품 (Radio Phonograph)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 4월 4일 RCA이사회는 빅터토킹머신 인수를 결정했다.)
1929년 사노프는 GM에서 자동차 대시보드에 라디오를 장착하는 법을 고안해 냈다는 사실을 알고는 즉각 GM으로 달려갔다.
“귀사 자동차에 RCA 라디오를 장착하는 제휴를 하고 싶습니다.”
알프레드 슬로언(Alfred P. Sloan) GM사장이 그의 의견을 즉각 수락했다.
RCA는 이런 방식으로 서서히 라디오제국의 세력을 키워 나갔다. RCA는 자회사 NBC는 진공관과 부품외에도 방송장비를 생산했고 축음기와 음반시장에서도 선도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1929년 10월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은 라디오산업계에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연극,영화 관객들이 급격히 줄면서 라디오청취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많은 회사들이 라디오 광고로 회생하게 되는 등 라디오 광고는 그 위력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대통령에 당선된 1932년 라디오의 보급률은 60.6%에 이르렀다.
루즈벨트대통령의 라디오방송 노변담화(Fire Chats)는 라디오의 위력을 가일층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RCA는 195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가장 유명한 라디오 수신기 브랜드였다. 그것을 깬 것은 1955년 등장한 소니의 트랜지스터라디오였다. 와이셔츠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라디오가 작아진 것은 진공관대신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때문이었다.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덕분에 사람들은 어디서든 라디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방안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라디오를 이젠 언제, 어디서든 휴대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다.
데이비드 사노프가 GE출신의 상사들에게 보낸 1922년의 메모가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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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휴대할 수 있어야 하며 언젠가는 자동차에서도 음악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사노프의 야망은 라디오에 머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야망은 하늘을 날아 그림을 보내는 기기, 즉 텔레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