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발자들의 경쟁력과 실패할 권리

전문가 칼럼입력 :2014/03/24 14:21    수정: 2014/03/24 14:24

임백준
임백준

최근 출간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과 관련해서 한 매거진과 서면인터뷰를 수행했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나라 개발자들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였다. 막연한 질문이지만 성의껏 답변을 했다. 교육수준이 높은 우리나라 개발자들의 잠재력이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현재의 모습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논의를 하려면 사실 ‘세계 수준’이 무엇인지부터 합의할 필요가 있지만, 어쨌든 우리나라 개발자의 경쟁력이 세계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개발자들이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실패할 권리”가 없는 사회 환경에서 찾는다.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는 조건이 부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번 실패는 살벌한 경쟁구도에서 영원히 도태되는 것을 의미한다. 패자부활전은 없다. 이런 환경에서 도전은 서부시대 총잡이들이 결투를 벌이는 것처럼 생물학적인 목숨을 거는 극단적인 행위가 된다. 사회적 안전장치가 없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대기업이나 전산실로 몰린다. 그들을 비겁하다고 나무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모든 개인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릴 자유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인에게 최선인 선택이 모이면 사회전체에 이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게 좋은 의미에서의 시장원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경우는 정반대다. 과감한 도전보다는 현상유지가 우선순위를 갖는 기업이나 전산실이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두 흡수하면서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그들의 능력은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어나 다른 사람이 제기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기계적인 작업에 동원된다. 기업 내부에서도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내고 도전을 하라고 독려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온실 속에서 화초를 키우는 것이다. ‘윗사람’의 관심이 줄어들면 누렇게 시드는 병약한 화초다. 거친 생명력을 가진 들판의 잡초와 비교할 수 없다. ‘세계무대’는 온실이 아니라 들판이다. 성공이라는 꽃은 수없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실패라는 거름을 먹고 자란다. 실패는 흙이요, 물이요, 햇볕이다. 그래서 ‘실패할 권리’가 없는 곳에는 성공도 없다. 수많은 벤처기업과 중소기업이 모여서 눈부신 은하수를 형성하는 이스라엘의 성공을 보라. 기업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다.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가 여부가 문제다. 이스라엘의 프로그래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실패할 권리가 회복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회적 안전장치의 마련이고, 다른 하나는 개발자 중심의 문화다. 어떤 종류의 사회적 안전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잘 알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은 디테일을 몰라서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지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예컨대 대기업은 좋은 인력 대부분이 자기 회사로 들어오지 않고 벤처회사를 차린다고 하면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래서 ‘복지’와 동일한 개념인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과정은 정치적인 설득과 강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청관행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프로젝트 단가의 현실화, 암묵적으로 이루어지는 주말작업이나 야근 관행의 타파, 벤처회사에 대한 자금지원이나 정책지원 등 필요한 것이 너무나 많다. 대기업이 벤처회사를 상대로 직원을 빼내오거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행위도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에 “규제완화”라는 화두를 제기했는데 사실 좋은 정책은 언제나 이해관계의 충돌을 수반하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 없이 집행될 수 없다. 규제라는 것 자체가 ‘완화’와 ‘강화’ 사이에서 기계적으로 선과 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진 규제인가에 따라서 완화가 선이기도 하고, 강화가 선이기도 하다. 그래서 실패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사회적 안전장치의 마련은 사실 대단히 정치적인 주제다. 실패할 권리를 위한 두 번째 요소로 지적한 ‘개발자 중심의 문화’는 기업이나 회사 내부의 권력구조와 관련이 있다. 핵심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사람, 즉 프로그래머가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련된 일체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개발자를 종처럼 부리는 기이한 현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벤처기업만이 아니라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코딩을 손에서 내려놓고 관리자가 되고, 40세가 넘으면 퇴직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프로그래머가 회사권력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에 비트와 바이트를 묻힌 채로는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진급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코딩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나이어린 후임들과의 경쟁에서 밀려서 코딩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프로그래머를 대체가능한 소모품으로 여기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나이든 비싼 소모품을 버리고 나이어린 값싼 소모품을 찾는다. 백발이 성성한 58세 프로그래머가 대학을 갓 졸업한 23세 프로그래머와 객체의 구조를 놓고 격론을 벌이는 일이 드물지 않은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어이가 없는 관행이다. 이래서는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련된 사회전체의 경쟁력이 초보적인 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한강에 다리를 놓는데 강의 중간까지 다리가 만들어지면 다 부수고 처음부터 시작하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자기 살을 파먹는 엽기적인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개발자의 손에 귀속시켜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하여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행성이 나이나 직책이 아니라 ‘기술적인 능력’을 중심으로 공전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실패할 권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상관이 있다. 기술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중요한 의사결정과 관련된 권한을 갖게 되면 진짜 프로그래밍 실력을 가진 사람이 존중받는 문화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실력이 좋은 프로그래머는 실력이 좋은 다른 프로그래머를 사랑한다.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기 아이디어를 펼치기 위해서 마음껏 도전을 하고, 혹시 실패를 하더라도 자기 실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취업을 하거나 재도전의 기회를 만날 수 있다. 프로그래밍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면, 진짜 실력을 알아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력서에 나열된 껍데기 같은 장식물에 관심을 더 쏟는다. 출신학교를 따지고, 지역을 따지고, 나이를 따지고, 아무데도 쓸모없는 토익점수 따위에 목숨을 건다. 벤처기업을 하다가 접고 취업을 결심한 사람을 마주하면 그가 가진 실력과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무모함과 실패를 조롱하는데 더 힘을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래밍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의사결정 권한을 갖도록 하고,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이 존중을 받는 ‘개발자 중심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실패할 권리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어쩌면 사회적 차원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 지도 모르겠다. 자기 아이디어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다가 장렬히 실패한 과거를 대기업에 입사했던 기록보다 더 자랑스러워하는, 실패할 권리와 자유가 강처럼 넘쳐흐르는 사회를 꿈꾸어본다. 그런 문화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개발자들의 수준’을 ‘세계 수준’에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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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백준 IT컬럼니스트

한빛미디어에서 『폴리글랏 프로그래밍』(2014),『누워서 읽는 퍼즐북』(2010), 『프로그래밍은 상상이다』(2008), 『뉴욕의 프로그래머』(2007), 『소프트웨어산책』(2005), 『나는 프로그래머다』(2004), 『누워서 읽는 알고리즘』(2003), 『행복한 프로그래밍』(2003)을 출간했고, 로드북에서 『프로그래머 그 다음 이야기』(2011)를 출간했다. 삼성SDS,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도이치은행, 바클리스, 모건스탠리 등에서 근무했고 현재는 맨해튼에 있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분산처리, 빅데이터, 머신러닝과 관계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