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서거]디지털 정치 개척자 떠나다

소통과 지식산업에 대한 탁월한 혜안

일반입력 :2009/08/18 15:30    수정: 2009/08/18 18:21

김태정 기자

‘인터넷 토론방, 촛불시위, 누리꾼 언론, 디지털 정치....’

정치 성향에 따라 호감이나 거부감이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이 오늘날 우리 정치사회에 있어 중요한 대목이 된 것은 분명하다. 18일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작품 중 하나다.

줄기차게 독재와 싸워 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식 소통’을 정치목적 중 하나로 삼았다. 특정 세력이 막은 국민 소통의 길을 뚫겠다는 의지를 누차 드러냈다. 세간에는 옥중에서 읽은 토플러 박사의 책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김 전 대통령에게 인터넷은 정치적 동반자였다. 그는 1997년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PC통신에 모습을 드러내는 등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취임 후에는 인터넷 강국 세우기에 팔을 걷었다.

우선 그는 인터넷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취임 첫해인 1998년 6월 시작한 초고속인터넷서비스는 4년 만에 가입자 1천만명을 넘어섰다. ADSL·VDSL 등의 사업자가 대거 등장했으며 언론과 증권, 교육, 금융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인터넷 서비스가 등장했다.

만약 이러한 인프라 구축이 없었다면 인터넷 서비스의 발전 속도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느렸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때부터 각종 포털에는 정치, 사회 문제를 논하는 카페와 토론방들이 생겨났으며, 누리꾼들은 스스로 기사를 만들며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시절 ‘디지털 정치’의 초기 모델이 등장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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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현상은 김 전 대통령의 재임 후기에 더욱 거세졌다. 인터넷서 토론하던 수많은 누리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를 뒤덮었으며 노무현 정권 탄생에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신문방송의 호평에도 불구, 누리꾼들에게 찍혀 정치 생활을 막내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퇴임 후에도 정권을 향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노령으로 인한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인 평가를 떠나서 인터넷 세상은 김 전 대통령에게 남다른 애도를 표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