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IPTV, 월드가든 2.0

전문가 칼럼입력 :2009/06/16 09:39

김국현

IPTV가 공회전하고 있다. 기름은 부어지고 엔진의 시동은 걸렸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대신 정원에서 연기만 내고 있다. 몰아주기식 정책적 비호를 입고도 아직 성장 엔진이 되지 못한 채, IPTV는 월드가든에 머물고 있다.

울타리 쳐진 정원이란 뜻의 월드가든(walled garden). 컨텐츠, 서비스, 기술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울타리에 의해 보호되어 외부와 교류 없이 독립되었거나 고립된 '네트워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대표적인 것은 특히 한국 핸드폰의 무선인터넷처럼 얼추 '인터넷'이라는 이름은 달고 있지만 밖으로부터의 유입도, 안으로부터의 유출도 쉽지 않은 폐쇄망들이다.

「C-P-N-T」(Contents, Platform, Network, Terminal)를 밸류 체인으로 묶는 것을 자신의 전략이라 자랑하는 이 폐쇄망의 주인들에게, 인터넷이란 이 중요한 가치들을 묶어 가둬 놓기 위한 일종의 사슬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폐쇄적 사슬이 시장 선점과 차별화를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의해 용인되고 때로는 심지어 보호받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씁쓸하다.

낙점 받은 업체가 도입기에서 겪기 쉬운 문제들도 국가가 함께 예산으로 고민해 준다. 다른 업태라면 번들이니 끼워팔기가 될 사안이, 융합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융합상품으로 오히려 활성화되기도 한다. IPTV는 바야흐로 이러한 정책 주도 월드 가든의 최신 모델. 상품 마다 서로 다른 체험과 내용을 제공하는 개별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이 또 다시 자연스럽고 비판 없이 이루어지고 또 진흥되고 있음에 무선 인터넷의 데자뷰를 느끼고 만다. 본디 하나인 네트워크, 인터넷. 이 자유의 세계에 다시 땅따먹기 하듯 벽을 에두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무선인터넷을 이 하나의 네트워크 인터넷으로부터 숨길 수 없듯, IPTV도 그 하나의 네트워크 인터넷으로부터 가릴 수 없다. 이는 불가역의 행진이다. 인류가 지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 중, 해가 갈수록 더 저렴해지고 더 강력해지는 것은 현재 하나뿐, 그것은 물리적 매체로서의 전파나 케이블이 아닌 논리적 세계로서의 인터넷이다.

여러 아무개씨의 법칙에 의해 점점 강력해지는 인터넷이 모든 채널을 흡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고, 그렇기에 인터넷 기술을 쓰면서 인터넷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일이란 결국은 무모한 일이다. IPTV를 하나의 분과 업종으로 봐서는 곤란한 이유다. 현재의 아날로그 전파 활용은 현재의 쌍방향 IP에 비해 비경제적이기에, 공중파도 케이블TV도 모든 TV의 미래란 결국은 인터넷과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래를 정책이 벽에 가두려 하고 있다. 월드가든은 기존 사업자, 특히 물리망을 소유한 통신사업자가 이 행진에 맞닥뜨려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일 뿐, 행여 이 것이 국가 정책으로 수행돼서는 아니 된다. 그 경위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월드 가든은 정서적으로 설득이 쉽다.

국가 산업 육성이라던가 공익성, 국민 정서 보호와 같은 부족감정에 합치되기 때문에 위정자들을 설득하기 쉽고, 이 것이 깨어진다면 큰 일이라도 날 듯 호들갑 떨기도 좋다. 게다가 그 것이 방송이라는 구래의 선전 도구와 융합되는 접점은 더욱 더 그러하다. 그 덕에 미래의 방송 기술에도 독자적 정원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오늘도 투하되고 있다.

월드 가든의 장점은 다양하게 고안된 보호장벽에 의해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고, 또 거꾸로 외부 환경이 이 보호 장벽 안의 특이성에 의해 거북해지지 않게 배려될 수도 있다는 쌍방향 방화벽 기능에 있다. 마치 온실처럼 독자적 군락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 장점인데, 보호와 육성의 산업 정책과 잘 들어 맞는다.

웹과 인터넷이라는 통제 불능의 무법지대로부터 안전하게 분리되어 수익 회수의 메커니즘을 마련할 수 있다 홍보하며 그 안으로 기술과 컨텐츠와 서비스를 유인한다. 이 유인 과정에는 대부분 정부 정책이 개입되고 또 한 줌의 특정 기업들에게만 사업권이 부여된다. 월드가든은 잘 꾸며 오픈한 유원지처럼 달콤하지만 시민 생활 공간으로써 그 기능의 한계란 명확하다.

프로그래밍에서 이야기되는 샌드박스(sand box)가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용 모래통을 의미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비슷한 작명 센스와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샌드박스가 이과적으로 논리적 기능을 지닌 개념이라면, 월드가든은 문과적으로 자의적 함의를 지닌다.

사실 문과적이라 하면 단지 경제, 경영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철학의 문제도 다룰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누구를 위해 벽을 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단답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샌드박스처럼 논리적 필연성이란 애초에 증명 불가능하다.

상식적으로 '보호장벽'이나 온실의 은유는 미숙한 것들의 성장을 보호하기 위한 한시적인 것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닫힌 세계의 밀폐된 따뜻함을 만끽하다 보면 한없이 나태해지고 연약해 질 수 밖에 없고, 급기야 야생성을 상실, 외벽 없이는 생존할 수 없어진다.

더 본질적 문제는 벽 안의 삶들에 대한 연민보다는 사회적 자원이 이 온실과 벽을 유지하기 위해 균형 잡히지 않은 형태로 배분된다는 점에 있다. 키워야 할 미래도 아닌 현재의 기회마저 온실에 온존시켜 외부와의 소통과 외래종의 참여를 거부한다. 미래를 위한 한시적인 진흥이나 육성이 아닌, 현존 자원의 제한적 분배 및 규제 정책의 결과가 바로 월드 가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월드가든은 왜 존재하는가? 사업자의 탓? 사실 묘사로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본질에 대한 통찰은 될 수 없다. 자본주의의 본성이 계속적 이윤이 추구될 수 있는 불로소득의 메커니즘을 갈망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기업의 탓을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

잉여를 지속적으로 확보될 수 있는 불균형한 경사로가 형성될 수 있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은 적어도 주주자본주의에서는 찾을 수 없다. 경쟁에 의해 가치 생산의 불균형을 만들어 내는 일이 바로 자본주의가 지닌 혁신의 원천임을 고려하면 그렇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이 '경쟁에 의해'라는 부분이다. 만약 승리의 원인이 외벽에 의한 것이고, 그 벽이 결국 하는 일이란 경쟁을 저해하는 일이라면 이는 어떤 '주의'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자연의 다양성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옳지 않다.

이를 거슬러 월드가든을 만든 이들은, 대중과 국민과 시장을 유아로 보고, 큰 어른인 자신들이 모든 것을 직접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무모하게 유원지를 만들어 대는 이들이고, 그러한 유원지가 세계의 전부라 생각해버리고 급기야 생활의 터전으로 삼은 우리 자신들이다.

월드가든의 장벽들은 다양한 형태로 둘러쳐 있다. 기술적 차이는 의지만 있다면 '게이트웨이'로 소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장벽을 친 배후의 동기는 좀처럼 쉽게 변하기 힘들다. 그래도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에게 도움이 된다는 안이한 국가적 가부장 주의를 모두가 묵인한 결과다.

그렇게 불필요한 법과 시행령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법의 이름으로 강요되며 이에 부합하는 사업자들만이 분리된 변종 인터넷을 양산하는 동안 웹이 지닌 다양성에 입각한 웹의 자유주의는 말라가고 있다. 우리가 그러는 사이 훌루가 유튜브가 미디어룸이 아이튠즈가 넷플릭스가 IPTV 너머 TV의 미래를 어떠한 정책의 도움 없이도 빚어 가고 있다. 우리도 통신사업자뿐만 아니라 방송사도 포털도 케이블TV사업자도 그리고 스타트업도 자신들이 플랫폼을 스스로 골라 미디어를 제공하려 애쓸 수 있을 때 이러한 혁신의 총아는 탄생할 것이다.

웹은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았고, 또 통제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무엇을 의무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생적 질서를 찾아 가며 미래를 열어 가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시장의 뒤를 잇는 새로운 형태의 자유의 실험대인 것이다.

이 새로운 미래를 스스로 싸워 지켜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관(官)이 가져다 놓은 유원지만 덩그러니 놓아져 있지만 그 의미의 심각함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열림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믿음을 잃어 버린 그 시점에, 늘 닫힌 공간은 생겨난다. 월드가든은 그 증거에 불과하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